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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Apr 23. 2024

사는 게 뭐라고

기분이 울적할 때면 자주 사노요코 할머니의 글 생각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 웃으면서 울게 되고 울면서 웃게 된다. '이게 뭐야?' 하면서 좋아하고, '살기 싫어.' 하면서 '살고 싶어.' 하게 된다. 어떤 때는 하늘에다 대고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하고 꾸벅 인사라도 하고 싶다. 이런 글을 남겨주셔서 아리가또. 위로해 주셔서 아리가또. 웃게 해주셔서 아리가또. 그냥 이유없이 아리가또... 그러고 있으면 왜인지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은데, 그녀는 그런 나를 향해 "다들 별 수 없어. 사는 게 다 그래." 하며 후후훗 웃어줄 것만 같다.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마주할 수 있다면.



그녀의 책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사는 게 뭐라고>다. (사노 요코, 이지수 옮김, 마음산책, 2015)

사노 요코는 어릴 적 열한 살 먹은 오빠가 굶주림으로 죽었고,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했고, 나를 왜 낳았냐고 소리치거나 입을 꾹 닫아버리는 아들을 하나 키웠고, 90대 노모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있고, 본인은 60대에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으나 재발 후 2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다.

<사는 게 뭐라고>는 바로 그 60대 후반의 시한부 할머니가 쓴 글들이 엮여 있는 책이다. 재미있을 상황은 하나도 없는데 시종일관 유쾌하고 솔직한 그녀의 이야기에 자꾸 웃음이 새어나온다. 그리고 코끝이 찡하니 눈물도 난다. 이 책을 읽고 '나도 이렇게 나이들고 싶다, 이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건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할머니가 되는 게 아니라, 스물 네 살의 자만에 찬 젊은 시절부터 이미 서서히 할머니가 되기 시작하는 거다. 아니 다섯 살 여자아이도 보고 있으면 팔십 먹은 그 아이의 영락한 말로가 비쳐 보인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 사람이 아닌 다른 할머니는 될 수 없다는 거다. 나는 나인 채로 할머니가 되는 거다.(사노요코, 서혜영 옮김,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p.354)

나는 나인 채로... 과연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라 그런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죽었다 깨어나면 또 몰라 나인 채로는 결코 그녀같은 할머니가 될 수 없을 다.



<사는 게 뭐라고>에서 첫번째로 기억에 남는 것은, 암에 걸린 늙은 딸이 치매에 걸린 엄마가 있는 요양원을 찾아가 자꾸 엄마의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장면이다.

 "엄마, 나 이제 지쳤어. 엄마도 아흔 해 살면서 지쳤지? 천국에 가고 싶어. 같이 갈까? 어디에 있는 걸까, 천국은."

옆에 누운 아흔의 엄마는 말한다.

"어머,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던데." (<사는 뭐라고>, p.109)


그리고 또 하나는, 암이 뼈에 전이되어 앞으로 남은 시간이 2년 정도라는 얘기를 들은 후에 그녀의 행동이다.

"항암제는 주시지 마시구요. 목숨을 늘리지도 말아주세요. 되도록 일상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p.242)

그리고는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재규어 대리점에 가서 바로 차를 한 대 산다. 연금도 없는 프리랜서가 아흔까지 살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이었다며, 그동안 모은 돈으로 재규어를 살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기뻐했다.

내게는 지금 그 어떤 의무도 없다. 아들은 다 컸고 엄마는 2년 전에 죽었다.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죽지 못할 정도로 일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남은 날이 2년이라는 말을 듣자 십수년 동안 나를 괴롭힌 우울증이 거의 사라졌다. 인간은 신기하다. 인생이 갑자기 알차게 변했다. 매일이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건 자유의 획득이나 다름없다.(p.243)


마치 영화를 본 것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두 장면이다. 내가 저만큼 늙었을 때에도 내 곁에 파고들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고, 언젠가 죽음을 앞두고도 저렇게 초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을 살아도 즐거워서 견딜 수 없을만큼 자유롭고 후련한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



그외에도 좋아하는 문장은 많고 많다.

-몸이라면 더 이상 안 써도 괜찮다. 귀찮고 성가시다. 하지만 사랑은 받고 싶다. 애정으로 한가득 채워지고 싶다.(p.135)


-암이라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눈을 끔뻑거리며 친절하게 굴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셋 중 하나는 암으로 죽는다. 당신들도 시간문제야. 나는 암보다 우울증이 몇 배나 더 힘들었다. 주위 사람들은 몇 배나 더 차가웠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점점 없어져갔다. 사람들이 없어지게끔 내가 변하는 것이다. 이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폐인이 되어 몇십년이고 살아야 하는 걸까. 내심 암에 걸린 사람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그런 속마음을 입으로 꺼내면 몇 안 남은 다정한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사라지고 말겠지. 내 우울증은 평생 낫지 않는다. 지금도 앓고 있다. (p.112)


-엄마는 매일매일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사람이 아닌 존재로 변해간다. 엄마는 치매에 걸리고 나서 고와졌다. 신기하게도 기품마저 생겼다. 치매에 걸리기 전 엄마는 난폭하고 거친 데다 기운이 넘쳤다. 그 때 나는 엄마의 옹고집 때문에 괴로웠다. 엄마가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자, 비로소 엄마를 용서했다. 정상일 때 용서했더라면 좋았겠지만 사람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왠지 나만 이득을 본 것 같다. (p.141)


-나는 일평생 같은 실수를 반복해온 듯 하다. 나는 깨달았다. 사람을 사귀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나는 스스로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 그것도 60년씩이나. 나는 나와 가장 먼저 절교하고 싶다. 아아, 이런 게 정신병이다.(p.187)


-1년만에 만난 30대 여자 지인을 "이야, 오랜만이야"하고 껴안는다. 아, 아직 가슴이 크구나. 몸은 팽팽하게 탄력있고. 당신, 앞으로 인생의 고난이 차례로 찾아올지도 몰라. 하지만 사람은 그걸 극복하고 살아가는 존재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30대 시절이 있었구나, 하지만 그 당시에는 자각하지 못했구나.(p.194)


-낳을 자유, 낳지 않을 자유라고들 말하지 말길. 아이는 하늘이 내리는 생명이다. 점지받은 생명은 모두 함께키워나가야 한다. 건전하다거나 불순하다는 말을 듣고 호들갑 떠지 말길. 건전만으로 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뿐더러, 자신이 건전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난 척이다. 건전 따윈 없다.(p.210)


-뻔히 질 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다. 포기해서는 안 된다, 도망치는 인생은 비겁하다. 혹시 마작이 도중에 그만둘 수 없는 게임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프로는 먼 곳을 바라본다. 패 건너편의 희망을. 인생은 도중에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눈앞의 욕망에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 먼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p.217)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꽃 한 송이의 생명조차 이해할 수 없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나 자신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죽는다는 사실이다.(p.182)



그냥 그렇다. 이건 책 소개도 아니고 리뷰도 아니고 내 글도 아니다. 그냥... 속이 답답할  이렇게 좋아하는 책을 뒤적거리면, 좋아하는 장면을 떠올리고, 좋아하는 문장을 따라 치다보면 어딘가 좀 나아진다. (필사는 싫다. 악필이라 뿌듯하지도 않고 팔만 아프다.) 거기다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노요코 할머니의 프로필 사진을 왠지 마음이 좀 편해지기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 한다. 억지로라도 까만 하늘에 별 하나 찾아내 "요코상, 오겡끼데스까? 오늘도 아리가또예요." 인사라도 한번 하고 잠자리에 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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