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서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김지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 창작과비평사,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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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침으로 두부를 넣은 된장국을 끓이고 훈제오리를 구워먹었다.
오전엔 아이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티비도 보았다.
점심은 고르곤졸라 피자와 까르보나라 스파게티를 시켜주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셋이 영화관에 갔다.
푹신한 리클라이너 의자에 앉아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모아나2>를 보았다.
집에 오는 길엔 마트에 들러 딸기와 귤을 한 박스씩 샀다.
아이들에게 딸기를 씻어 내어준 뒤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반납하고 다른 책 두 권을 빌려왔다.
저녁으로는 돼지불고기와 애호박전을 구워주었다.
크리스마스 트리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 성화에
보일러실에 숨겨두었던 트리도 꺼내 꾸미게 해주었다.
중간중간 청소기를 밀고 빨래를 개고 널고
잡다한 집안일들을 하였다.
한 것도 없이 감기에 걸려서 코를 수시로 풀어댔고
입으로 겨우 숨을 쉬며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어보곤 했다.
따뜻한 집에 편하게 있다는 사실.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 사실.
혼자만 아무일도 없는 듯 평범하기 그지없는 토요일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종일 죄스러웠다.
차가운 거리에 나가 뜨겁게 울부짖는 분들께 죄송하고 감사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어른이자 엄마로써 미안했다.
지난 열흘간 나는, 나의 분노와 괴로움과 두려움이 어쩜 이리도 고요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놀랐다.
처음 거리로 나갔던 때가 떠올랐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 참혹하게 죽은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는 집회.
교복을 입고, 선생님 말씀을 어기고, 서면에서 하야리아부대까지, 울면서 걸었더랬다.
어쩌면 그때의 내가 더 인간적인 인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지금, 이렇게도 차분히 마음을 다스리고 착실히 일상을 지켜내는 마흔살 어른 사람이 된 것이 대단하고도 부끄럽고도 슬펐다.
어제 밤에는 친구 J에게 아주 오랜만에 안부문자를 받았다.
이승환 밴드를 보니 내 생각이 나서 연락해 보았다고 했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데도 바깥인 사람들. 반팔을 입고 노래하는 나의 가수.
헤아릴 수도 없는 불빛들.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추울텐데. 같이 못해서 미안하고 고마워.
내 말에 친구가 그랬다.
-니가 미안할 일이 아니지!
미안해할 사람은 사죄하지 않는데. 여전히 미안한 줄도 모르는데. 나는 계속 미안했다.
미안하고 죄송하고 고맙고 감사하고 계속 그랬다.
그랬다는 걸. 함께 하지 못한 사람이라 따뜻한 집에 앉아서도 마음은 오히려 더 추웠다는 걸.
그런 변명을 담은 글을 몰래 써 둔다.
민주주의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