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나의 예수 - 엔도 슈사쿠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엔도 슈사큐 작가의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에 이은 예수님에 관한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같은 동양권 문화라서 더 깊이 공감가는 것도 있겠지만, 어려서부터 간직해 온 신앙임에도 늘 신앙에 대해 생각하며 자신만의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의 진실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엔도는 신약성경에 나온 복음서의 부분들을 읽으며, 자신만의 소설가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상황을 추측해보고, 그 안에서 전해주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엔도를 보며 나 또한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신앙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아가고, 구하는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겠다는 마음도 새롭게 해 본다.
3부작의 첫 편인 ‘예수의 생애’에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절대적인 신앙의 중심 존재로서가 아닌, 인간을 닮은 더 나아가 기꺼이 인간의 고통을 겪으시며 본인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바치시기까지의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줬다.
두번째 작품인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는 예수님 사후에 사도들이 어떻게 완전히 신앙적으로 회개하고 깨달은 뒤 예수님의 복음(사랑의 말씀)을 위험을 무릅쓰면서, 어떤 경우에는 순교를 마다하지 않고 열정적으로 전하였는지, 특히 로마 제국 지배 하에서 쉽지 않은 다른 국가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전파했는지 그 여정을 그리고 있었다. 이후 ‘그리스도교의 탄생’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예수님 사후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탄생하고, 전세계적인 절대적인 종교가 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최종 완결편이라 할 수 있는 ‘나의 예수’에서는 엔도가 어머니를 따라 자연스럽게 유아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지만,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지, 정말 어머니의 뜻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신앙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지 등의 ‘나의 예수’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일종의 고백서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당시 일본에 널리 퍼져있던 일반인들의 생각, 즉 ‘그리스도교는 왜 보수적인가’, ‘동양인에 걸맞지 않은 종교가 아닌가’, ‘왜 예수는 서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 ‘신이 있다면 왜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질병과 가난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등의 저변에 널리 퍼져있는 신앙을 둘러싼 부정적 시각에 대한 답변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자신도 그리스도교를 오해하고 편견에 사로잡힌 적이 있습니다. (…) 그러나 의문을 품었다고 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은 99%의 의심과 1%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책 본문 中>
엔도는 특히 자신의 방황과 의심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에게 신앙이 어떤 의미이고, 성경에서 그려지는 예수님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 알려주고 있다.
‘예수의 생애’에도 그려지고 있지만, 다시 한번 극심한 외로움을 겪으셨을 예수님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방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취하려고 하는 군중들과 제자들 속에서 겪으셨을 예수님의 심란함과 답답함.
한편으로는 안쓰럽기까지 하고, 왜 그렇게 군중들의 마음 속에는(심지어 사도들 조차) 완고함이 자리잡고, 현세에서의 일시적인 욕망에 집착했는지 답답해 온다. 하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판단해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겠지만, 나 또한 한없이 작은 존재로서 현실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임을 처절하게 느껴본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진정한 하느님을 찾기 위해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시며 ‘악마’(이 책에서는 현실적인 정치 지도자를 요구하는 극렬주의자 에세네파 부류를 포함)의 유혹을 물리치신다.
이후 하느님 말씀의 본질은 곧 ‘사랑’임을 깨달으시며 ‘진정한 사랑’을 전파하시기 위해 제자들과 선교 여정을 떠나신다. 이 과정 속에서 예수님이 느끼셨을 좌절과 본인의 생각을 따라오지 못하고 이해하지 조차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실망, 현실적인 부분(치유의 기적, 표징, 로마 정권에 맞설 정치지도자 등)만을 과도하게 요구하는 군중들의 욕심에 이르기까지 그 기간 동안 숱하게 겪으셨을 그리고 하느님께 끊임없이 기도하셨을 예수님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엔도는 특히 이 과정에서 구약에서 나타나는 엄격하신, 벌주시는, 무서운 존재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부드럽게 사랑으로 감싸고, 손을 잡아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공감해주는 어머니 같은 모성(母性)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가 생각하는 예수 상像은 이처럼 성내거나, 벌하거나, 심판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거의 없습니다. 그보다 오히려 예수가 생각했던 ‘하느님’은 당시까지 전해지던 부성적 이미지가 아니라, 모성적 이미지였다고 강조해 왔습니다.” <책 본문 中>
이는 노리치의 율리아나 성녀가 쓴 ‘사랑의 계시’와도 겹치는 부분인데, 율리아나 성녀는 자신이 받은 열여섯 번의 계시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서 묵상하고 있는데, 이 중 성자인 예수님을 ‘어머니’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율리아나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고통을 받으시고, ‘죄 사함’을 통해 인간의 구원과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모성(母性)으로 표현했었다.
이에 베네딕토 16세 교황님도 예수님의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시며 강론 中에 “그리스도께서 수난을 당하신 것이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기에 인간은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머물러야 한다.”고 강조하셨으리라 생각해 본다.
아울러, 이전 책들에서도 나오지만 예수님의 체포와 죽음의 순간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철저하게 배신하고 현실적인 타협을 했던 사도들이(제자 그룹 전체)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 이후 회심하고 깨달아서 열정으로 예수님 말씀을 선포하고 다녔는지는 정말 궁금하다. ‘나의 예수’에서는 배신함을 알고 계셨고, 실제 당하셨음에도 용서하시고 품어주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행동에 제자들이 큰 울림을 받았으리라 덧붙이고 있다.
죽음의 공포 앞에 한없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어떤 계기로 철저하게 스승을 배신했던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복음을 설파하고 그리스도교의 전파에 힘쓰며 순교까지 이르렀는지 그 마음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하고 또 생각하게 될 것 같다. 물론, 가장 큰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시며, 우리가 행하지 않은 것까지 전부 용서해 주신 예수님의 큰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바탕에 두고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엔도도 말하고 있지만 신앙을 믿기 전에는 신앙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실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엔도가 지적하듯이 이는 이제야 하느님을, 예수님을 받아들이며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실천하면서 그분께 온전히 나를 의탁할 수 있는 길의 시작임을 깨닫는다.
“세례를 받은 후 신앙을 어떻게 이어 가는지가 중요한 것임을 이제는 압니다.” <책 서문 中>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나에게 신앙이란 어떤 의미이고,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어떤 것인지 계속 자문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실천,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많은 사람들의 조금씩의 사랑의 실천이 결국에는 ‘사랑의 확산’과 ‘용서와 화해’가 이뤄지는 길이리라 생각해 본다.
“쉬운 일은 사랑과 무관합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 추한 것을 끌어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은 성경에 분명히 쓰여 있습니다.” <책 본문 中>
그저 이만큼 믿고 기도했으니, 나에게 응당 더 많은 것들을 보상해 달라는 마음으로, 아니면 나를 둘러싼 타인들에게 영성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아니면 종교와 신아에 대해 남들 앞에서 지식 자랑을 하는 도구로서 신앙을 대하지는 않는지 다시 한번 나를 돌아본다.
“하느님보다 하느님의 선물을 더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악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예수님 삶의 모습을 따르고 있어야 하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내는 거울이 되고 있어야 합니다.’라는 말처럼,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섭리’로 이뤄짐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용서와 화해와 배려의 마음을 우선 가져보도록 한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 50)하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항상 주님의 말씀을 듣고, 새기고, 조그만 것 하나라도 실천하는 것, 나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오늘도 다짐해 본다.
‘나의 예수’란 신앙적 고백이다. 신앙은 각자의 삶에서 시간과 함께 깊어져 가기에 누구에게나 ‘나의 예수’를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의 예수’를 찾기 위해서는 긴 시간 개인적인 체험이 쌓여야 한다. 이러한 시간을 보낸 후에야 결국 우리도 “나의 예수”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옮긴이 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