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데없이 재미있게 살아볼게
‘오빠… 그만 좀 달려’
짝꿍과 강원도 속초 가는 길… 조수석에서 문득 섬뜩한 기분이 들었던지… 부스스 한쪽눈만 게슴츠레 도끼눈을 뜨며 던진 그녀의 경고입니다.
계기판을 보니 시속 150과 160 사이에서 바늘이 파르르 떨고 있습니다. 조수석에서 짝꿍이 잠든 사이 또 혼자 신나게 엑슬레이터를 밟은 모양입니다. 나도 모르게 과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아마도 이게 다 급하고 경박하고 못된 내 성격 탓이 분명합니다.
‘응… 방금 그런 거야… 계속 천천히 가고 있었어!’
이유 같지 않은 핑계로 둘러댔지만… 특급 감식 요원 같은 짝꿍은 어디 말 같지 않은 소리냐며 타박입니다.
도로 곳곳 속도위반 카메라가 있지만 그 앞에서만 잠시 속도를 줄였다 또다시 분노의 질주입니다. 휘발성 인격장애가 틀림없습니다.
다행히 핸들만 잡으면 지킬과 하이드를 오가며 눈을 희번득 거리는 운전자를 위해 ‘과속 단속 구간’이 있습니다.
이럴 때면 몇 km의 거리를 시속 100과 110 사이 정속으로 주행해야만 됩니다. 나와 같은 못된 인간들에게는 아주 미칠 노릇입니다. 시간이… 속도가 아주 느리고 천천히 흘러가는데 ‘아! 이것이 바로 아인슈타인 선생께서 그토록 말했던 상대성 이론이구나’ 깨닫기도 합니다. 속도도 참을 수 없고 게다가 상대성 이론이라니 고문이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날 속초 가는 길은 좀 달랐습니다.
속도를 줄여 정속으로 10여 km를 달리다 보니 좁아졌던 시야가 트입니다. 산도 보이고 강도 보이고, 옆에 도끼눈을 치켜뜬 짝꿍도 보입니다. 뒷자리에 뭐든지 물어뜯겠다며 모든 세상사에 불만인 사춘기 딸도 눈에 들어옵니다. 속도 좀 줄였다고 세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미시령 고개를 넘으며 생각합니다.
인생에도 이런 구간이 있으면 어떨까?
호사스럽게 천천히 걷지는 못하더라도, 너무 조급히 앞서지 않고
인생의 속도에 맞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정속으로 걸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인생이라는 핸들을 부여잡고 앞도,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엑슬레이터를 끝까지 밟고 있었던 건 아닐까?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 감각을 잃고 방향을 잃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번아웃
너무 달리다 보니... 오직 달리다 보니,
목적지를 잃고 어디로 가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옆에 소중한 누군가가 있는지도 모른 채 달리고 달리다 엔진이 터지고 교통사고가 나는 건 아닐까...
도로에 과속단속구간이 있다면
인생에도 과속단속구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은 마음이 가볍습니다.
차장밖으로 왼손을 내밀어 손가락 사이사이 스치는 간지러운 바람이 기분 좋습니다.
구비 구비 미시령 고개를 따라… 속초 앞바다와 울산 바위를 바라보면 천천히 도로를 내려옵니다.
‘끼익’
코너에서 내 차를 앞질러 자동차 한 대가 쌩하니 달려 나갑니다. 다시 혈관 속에는 미하엘 슈마허 같은 F1 드라이버의 광기가 튀어나옵니다. 다시 풀악셀을 밟습니다. 우아한 어른이 되기는 다 틀렸습니다. 작심 30분입니다.
P.S.
카피라이터가 퇴사하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번아웃!
누가 광고 회사에도 과속단속구간 좀 만들어주세요.
image : Jeffery Heil / EyeEm - Getty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