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데없이 재미있게 살아볼게
어디 사세요?
청.담.동.에 삽니다.
…
아… 좋은 곳 사시네요.
새로운 광고 프로젝트를 하나 수주하고 광고주와 첫 만남 자리의 스몰토크입니다.
'청담동에 삽니다'라는 말은 어색함을 없애야 하는 아이스브레이크 스몰토크를 아예 꽁꽁 얼어붙은 남극 대륙으로 몰아넣고 맙니다. 바보! 멍청이! 이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후회합니다. 몇 번 그런 일을 겪다 보니 이제 누군가 동네를 물어보면…
‘아.. 네.. 다행히 서울 안에는 살고 있습니다’라는 말로 뭉숭그려 대답합니다.
청담동은 주홍글씨입니다.
'청담동에 삽니다' 말하는 순간... 들숨이 멈추고 짧은 순간 시간이 정지합니다.
생각해 보면 일을 주는 ‘갑’ 광고주 입장에서 ‘을’인 광고 대행사 누군가 그런 부자 동네 같은 곳에 산다 말하면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이 업계에 슬픈 농담 하나가 전해지는데, 광고 제작을 위해 촬영장에 모이면 감독은 람보르기니를 타고 오고, 프로덕션 PD는 BMW를, 대행사 기획자는 그랜저를 타고 오고 광고주는 버스를 타고 온다 합니다. 씁쓸합니다.
일을 주는 광고대행사 입장에서도 ‘병’인 감독의 비싼 람보르기니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참 묘해지니 광고주에게 청담동에 삽니다는 대답이 좋아 보일리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말하지 않습니다. 새어 나오는 동네 이름을 손바닥을 틀어막습니다.
다른 세상 이야기 같지만
청담동에 모두가 부자만 사는 건 아닙니다. 모두가 명품을 휘감고 다니지도 않습니다. 굳이 나누자면 은행빚만 있고 명품 하나 없는 나에게 그저 청담동은 서울의 많은 동네 이름 중 하나일 뿐입니다.
'평창동요... 청담동요'... 평창동 사는 동창 녀석과 술자리를 파하며 택시를 부릅니다. '뭐야 저 사람들' 남들이 들으면 참... 거판한 사람들로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평창동 초입 반지하에 사는 노총각 녀석과 청담동 구석 오래된 전세 아파트에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게 15년 남짓 살다 보니, 찾아낸 사실 하나.
휴일 오후, 동네 스타벅스에 가면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이런 날… 모델처럼 잘 차려입고, 명품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휘감은 사람은 대부분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거나 청담동에 놀러 온 사람이라는 겁니다.
동네 사람은 늘어진 흰 티셔츠와 지저분한 컨버스 신발이나 슬리퍼에 눈곱 낀 얼굴 가림용 선글라스 하나면 그만입니다.
언젠가 어디 사세요? 누군가 물었을 때.. 청담동에 삽니다… 편하게 호부호형을 허하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저 슬리퍼 하나 신고 편안하게 다니는 내 동네를 사랑하고 싶습니다.
골목길 어귀에 노란색 람보르기니가 으르렁으르렁 성난 소리로 지나갑니다.
짝꿍이 물어봅니다.
‘저 사람들은 무슨 돈으로 저런 차를 타고 다닐까?’
‘글쎄… 프로덕션 감독인가 보지…’
'코인 이딴 거 하나?'
'동전 말이야? 나도 지금 주머니에 좀 있는데...'
'.....'
괜찮아 저 사람들은 부富를 담당하고
우리는 빈貧을 담당하면 그만이지 뭐
P.S.
그래도 김밥은 전국에서 이곳 청담동 김밥천국이 가장 맛있습니다. 김밥천국 광고주님… 듣고 있나요? 그러니 광고 좀 주세요! 배 고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