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그 여자의 뒷모습_3.

by BOX

어깨끈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이런 해괴망측한 그림이라니! 끔찍해!'

'피부색은 왜 이런가? 죽은 시체도 이보다 낫겠어'

1884년 5월 1일, 파리 살롱전의 관람객들은 분노했다. 치밀어오는 화를 참지 못했다. 삿대질과 고성이 오갔다. 그렇다. 이게 다 욕받이 그림 탓이다. 화가는 그림만 성공하면 팔자를 고칠 줄 알았다. 그는 야심에 불탔고, 성공에 몸이 달았다. 한데, 계산을 해도 한참을 잘못한 거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존 싱어 사전트 John Singer Sargent는 야망에 찬 전도유망한 화가였다. 빼어난 실력과 언변, 사교술까지 MBTI 극 E의 사교계형 인싸였다. '초상화가로 대박을 치려면 뭘 해야 할까?' 빠르게 성공하고 싶었던 그의 머릿속에 묘수가 하나 떠올랐다. 당시 파리 사교계의 슈퍼스타는 버지니 고트로 Virginie Gautreau였다. 그녀가 누군가? 프랑스 금융계의 큰손을 남편으로 둔 슈퍼셀럽이자, 인플루언서가 아닌가? 남편보다 20살 어린 나이, 우윳빛깔 피부, 완벽한 실루엣. 그녀를 그릴 수만 있다면, 성공은 따논 당상이었다. 어떻게 했을까? 그녀에게 제 발로 찾아가, 집요하게 초상화를 그려주겠다 졸라댔다.


사실 아쉬울 것 없던 그녀는 사전트의 끈질긴 성화에 못 이겨 모델을 승낙했다. 그런데 그림은 생각보다 진척이 더뎠다. 수정을 하고 구도를 바꾸기도 수차례. '어떻게 하면 더 자극적으로 보일까?' 뭔가 남들 눈에 확 띌 한방이 필요했던 거다. 결국 화가는 그녀의 포즈를 결정했다. 몸은 대담하게 정면을 향하게 하되, 머리를 옆으로 돌려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의도적으로 절반만 노출시켰다. 시선은 관람객에 닿지 않게 하고 어깨끈은 슬쩍 흘러내리게 했다. 반쯤 감춘 얼굴과 드러난 어깨 —그건 절묘한 유혹의 구도였다. 게다가 뭔가 관심을 끌 목적으로 그림의 제목을 수수께끼처럼 <마담 X>라 붙였다. 맞다. 어그로를 끌 속셈이었다. 뼛속까지 관종의 흥행업자였던 셈이다.


Study_of_Mme_Gautreau_by_John_Singer_Sargent_c1884.jpg <마담 X>, 존 싱어 사전트, X의 B컷, '어떻게 해야 자극적으로 보이지?' 화가는 흥행 대박을 꿈꾸며 어깨끈을 이리저리 배치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흘러내리게 한 어깨끈에 사람들이 분노한 거다. '이런 천박한! 당장 옷을 벗겠다는 의도야 뭐야?' 살롱전의 모든 여성 관람객들은 욕을 퍼부었고 남성들은 음흉한 시선만 던졌다. 비평가들은 연일 분노의 글을 쏟아냈다. 흥행대박을 꿈꿨던 사전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 멘붕이다. 당황한 건 화가만이 아니었다. 고트로와 그녀의 어머니 역시 공황에 빠졌다. '가문을 먹칠했어!' 화가 난 그들은 당장 자신의 그림을 내리라 요구했다. 어찌 됐을까? 화가는 흘러내린 어깨끈을 다시 슬쩍 어깨에 걸치게 했다. 그림에 물감을 덧칠한 거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전트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의뢰가 끊겼고 천재화가는 파리의 미운 오리새끼가 됐다. 결국 밥줄이 끊긴 그는 전시 몇 달 만에 파리를 떠나 런던으로 망명하고 만다. 마담 고트로 역시 화려한 사교계에서 퇴출당하게 된다. 어깨끈 하나가 두 사람의 운명을 바꿔 놓은 거다.


Madame_X_(Madame_Pierre_Gautreau),_John_Singer_Sargent,_1884_(unfree_frame_crop).jpg <마담 X>, 존 싱어 사전트, 1884, 흘러내린 어깨끈을 다시 슬쩍 치켜올렸다.


<마담 X>는 이후 화가의 아틀리에 깊숙이 20년을 몰래 숨어있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모나리자로 불린다. 곱지 않았던 과거 탓인지, 여전히 그녀는 관람객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있다.


John_Singer_Sargent_in_atelier.jpg 존 싱어 사전트의 아틀리에, 1885경, 한바탕 스캔들 후 화가는 <마담 X>를 꽁꽁 숨겨놓았다.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이제 뭐 해 먹고살지?


무대 뒤의 B컷 시선


지루함 탓일까? 피곤함 탓일까? 한 소녀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등을 긁고 있다. 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배시시 웃음이 난다. 그녀의 옆엔 얼굴이 반쯤 가려진 소녀가 귀걸이를 만지작 거리며 딴청이다. 소녀들은 수업 따위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 흔하디 흔한 교실 풍경이다.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초록리본의 소녀 역시 수업은 안중에도 없다. 새로 산 부채만 바라볼 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수업은 재미없다. 찰깍! 드가의 <발레 수업>은 이 무심한 순간을 포착했다.


Edgar_Degas_-_La_Classe_de_danse.jpg <발레 수업>, 에드가 드가, 1874,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선생은 당시 유명한 발레 마스터 쥘 페로다. 제 아무리 유명한 일타강사라도 수업은 역시 수업이다.


인상주의 창시자 중 한 명인 에드가 드가 Edgar Degas는 인상주의라는 말을 싫어했다. 자신은 빛보다 '사실'을 그리는 화가라 여겼다. 다른 화가들은 빛과 자연을 쫓아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는데, 이마저도 싫어했다. 게다가 그들처럼 가난하지도 않았다. 자존심과 고집도 강한 데다, 원래 귀족도 아니면서 드 가 De gas로 불려지길 원했다. 우리는 안다. 이런 사람치고 친구가 없다. 아무튼 인상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그는 철저한 비주류였던 셈이다.


드가는 발레 덕후다. 유화, 파스텔, 드로잉, 판화, 조각 등을 포함해 1,500점 이상의 발레 작품을 남겼는데 이는 그의 작품의 절반이 넘는 압도적인 숫자다. 아무튼 죽는 순간까지 발레리나를 그리고 또 그렸다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의 작품은 화려한 무대보다 무대 뒤를 그린 그림이 더 많다. 리허설, 휴식, 기다림의 그림들이다. 왜일까? 드가의 남다른 시선 때문이다.


19세기 당시 오페라 발레학교의 어린 무용수들은 '작은 쥐들 Petits Rats'이라 불렸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노동자 집안 출신이었고, 오페라의 부유한 후원자, 스폰서들과 연결되며 성적 대상이 되곤 했다. 맞다. 공연이 끝나면 매춘으로 이어지는 슬픈 직업이었던 거다. 드가는 이런 시대의 슬픈 자화상을 그의 눈으로 포착해 냈다. 그것은 분명 B급 시선이었다. 그의 그림이 무대 뒤에서 더 생생한 이유다.


IMG_5242.HEIC <열네 살의 작은 무용수>, 에드가 드가, 1881, 오르세 미술관, 뒤돌아 선 소녀는 이제야 앞을 보고 있다. 얼굴은 여전히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것 같다.


TIP. 그 남자와 그 여자의 뒷모습이 남긴 유산들

또 빌어먹을 히틀러다. 아돌프 히틀러는 게르만 정신의 상징이라며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를 나치의 선전도구로 사용했다. 난데없이 화가는 나치 제국주의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죽어서도 편치 못했던 거다. 그냥 제발 나 좀 놔두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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