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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형 Oct 09. 2024

나이 들어서 여행을 더 다니는 이유

김남조, <겨울바다>


(참고 : '어른이 되어 국어책을 펴보았다1'- 30화 연재 분량이 마감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국어책을 펴보았다2' 로 이어서 씁니다.)


여행을 좋아합니다. 한때는 “내가 번 돈은 전부 길바닥에서 쓰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적 있을 정도로, 저는 여기저기 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그렇기에 시간이 될 때마다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세월은 흐르고, 삶은 유한합니다. 벌써 생의 많은 시간이 지났고, 이제 얼마나 남은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드는 건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행을 통해 경험합니다. 이국의 땅에 발을 디뎠을 때 느끼는 긴장감, 광활한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를 보며 떠올리는 또 다른 삶, 여정을 함께 한 가족과의 소중한 추억... 여행은 제에게 경험, 그리고 깨달음을 줍니다. 이번 작품 역시 이것과 관련됩니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 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 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김남조의 <겨울 바다>는 유명한 작품입니다. 학창 시절엔 교과서에 있었고, 교사가 된 후로 수십 번 가르쳤으며, 시험에도 여러 번 나왔지요. 하지만 학창 시절엔 개인적으로 와닿는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배우는 방법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겨울 바다라는 공간의 인식 변화’, ‘불(허무, 소멸, 상실의 이미지)과 물(생명, 극복의 이미지)의 상징적 의미 대립’, '주제는 삶의 절망과 허무에 대한 극복 의지' 등 학교에선 시험에 대비해 이 시를 분석하며 일종의 수학 공식처럼 배웠지요. 제가 학창 시절에 공부했던 것과 지금 참고서에 써 있는 내용은 달라진 게 없습니다.      


게다가 학창 시절에는 겨울 바다에 가 본 적이 없습니다. 사랑의 실패와 삶의 좌절을 겪어본 적도 없었지요. 그렇기에 공감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냥 모의고사에 잘 나오는 현대시 정도로 공부하고 넘어갔어요.    

      

이제 어른이 되어 작품을 다시 봅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많은 생각을 줍니다. 몽골의 드넓은 홉스골 호수, 네팔 안나푸르나의 눈 쌓인 봉우리, 캐나다 옐로나이프 밤하늘을 수놓은 녹색 오로라, 일본 구마모토 아소산의 진한 유황 냄새, 베트남 퐁냐케방의 기암괴석 석회암 동굴들.... 살면서 운 좋게도 여러 멋진 곳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갔던 곳들은 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작은가를 겸허히 인식케 하는 동시에, 삶을 되돌아보게 하지요. ‘아, 너무 걱정하면서 살 필요는 없구나.’라는 마음도 들고요. 


작가에게도 ‘겨울 바다’는 인식 변화와 깨달음의 공간입니다. 처음에는 슬펐지요. 모든 게 허무했고요. 아마도 이별(그대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 그리고 신앙(뜨거운 기도의 문)을 통해 작가는 삶을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한번 더 겨울 바다 앞에 서지요. 그 광활함과 차분한 차가움 때문이었을까요? 이제 그곳은 슬픔과 허무를 묻어줄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인고(忍苦)의 물이 바닷속에 기둥을 이루는’ 건 슬픔과 좌절을 묻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작가에게 ‘겨울 바다’는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이 아니었다면 슬픔은 보다 오랫동안 지속되었을지 모릅니다.      


살면서 슬프고 답답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가 볼 곳도 많지요. 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됩니다. 가까운 데에도 좋은 곳은 늘 있습니다. 저 역시 남은 시간 그곳들을 열심히 찾아 다니려고 합니다. 그곳에서 지난 삶을 떠올리고, 힘든 건 털어놓고, 삶의 만족감과 겸허함을 느끼면서 추억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렇게 살면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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