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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umi Oct 08. 2024

이름없는 여자의 여덟가지 인생

- 이미리내, 위즈덤하우스, 2024. 정해영 역

스스로 자신을 노예, 탈출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그리고 어머니(본문 p31)라고 이름 지은 여자의 인생 이야기.      


여자의 첫 번째 인생에 이름은 없다. 그때부터 여자는 한 이름에 규정되지 않은 여러 인생을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걸까? 여자는 시간적 배열보다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드러내는 순서로 여덟 가지 인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여자의 인생을 시간적 배열로 짚어보려 한다.      


첫 번째 인생 - 여자는 평양 북쪽 교외 인근 허구리라는 작은 농촌에서 가난한 어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나를 몰랐다. 우리는 혈관에 흐르는 피 말고는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중략) 아버는 모든 것을 흑과 백으로만 볼 수 있는 단순함의 세계에 살았고, 회색의 다양한 색조들을 이해하지 못했다.’(본문 p61) 아버지가 참치나 고래를 잡으러 먼바다에 나가고 엄마와 지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유년기라고 기억하는 여자는 결국 배가 난파되지 않고 돌아와 온 집안을 폭력으로 뒤덮은 아버지를 독살한다.(1938년)     


두 번째 인생 – 여자는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 중, 인도네시아의 스마랑에서(1942년 –1945년) 성(性) 노예가 된다. 이곳에서 여자는 용말을 만나고, 이후 여자의 인생은 용말의 인생과 겹치게 된다.      


세 번째 인생 – 1950년. 여자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졌던 학교 건물을 개조한 하우스(한국전쟁의 미군 위안부시설)에서 남자행색을 하며 통역을 한다. 여자는 이곳의 위안부 여자들을 도피시키며, 건물에 불을 지르고 월북한다.      


네 번째 인생 – 1955년. 여자는 용말의 가죽부츠를 신고, 용말의 남편을 만난다. “여보”(본문 p144) ‘완두콩만 한 크기, 옅은 가지색. 그가 그녀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작은 특징이었다.(중략) 그런데 볼록한 점이 없다.’(본문 p166-167)    

 

다섯 번째 인생 – 1961년. 용말로 사는 여자는 더없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지만, 여자는 꼬리가 밟히고 남파공작원이 된다. 가족에겐 긴 출장으로 알리지만, 여자는 파주의 미군기지를 정찰하는 처녀 귀신이 된다.      

여섯 번째 인생 – 2005년. 남한의 수사관은 여자를 취조하고 있다. 여자는 남파 공작원이 된 딸의 안녕을 위해, 그동안의 행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일곱 번째 인생 – 2005년. 남파 공작원 최미희의 시간으로 여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결로, 여자의 인생 중 한 단락을 이룬다.      


여덟 번째 인생 – 여자는 파주에 있는 공립 황혼요양원에서 인생의 마지막 챕터를 쓰고 있다. 여기서 여자의 이름은 묵미란, 나이는 98세. “난 이 책에 대한 모든 권한을 자네에게 위임하네.” 여자는 죄인의 죄를 사해주는 사제처럼 짐짓 경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본문 p387)


일제 강점기에 이은 한국전쟁 중 이름도 없이 죽어간, 혹은 상처 투성이로 살아남은 수많은 여자들... 우리는 이들의 절규를 못 들은 체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는 나라에서도 권장하는 바, '이제 그만하면 됐다. 돈으로 보상해 주겠다.' 며, 이들의 절규를 틀어막으려 한다. 하지만 그러한 대응은 별 효과가 없음을 이 책을 보며 느낀다. 아무리 공권력이 막고, 우리가 귀를 틀어막아도,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이며, 이는 아직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았음을 우리에게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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