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픔, 사랑 그리고 패배가 뒤얽힌 삶의 실타래
태평양을 막는 제방(민음사, 2022년. 윤진 역)
연인(민음사, 2017년. 김인환 역).
1914년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반도 베트남에서 태어난 뒤라스는 36살이 되던 1950년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발표해 콩쿠르 상 후보로 올랐고, 1984년 「연인」으로 콩쿠르 상을 수상할 당시 그녀의 나이는 70살이었다. 작가 스스로 “두 책은 한 몸”이라 고백할 만큼 두 책은 자전적 요소와 주제 면에서 같은 뿌리를 가진다. 「태평양을 막는 제방」에서의 ‘쉬잔’과 「연인」의 ‘나’는 뒤라스 자신이다.
가난, 무기력, 패배 그리고 폭력을 개인의 서사로 풀어낸 뒤라스의 글은, 스웨덴 한림원이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인 산문”이라고 밝힌 한강작가의 2024년 노벨문학상 선정이유와도 부합된다.
내가 처음 만난 「연인」은 1992년 장 자크 아노 감독, 제인 마치와 양가휘 주연의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연인」이다. 양가휘의 흔들리는 눈빛 그리고 남성용 중절모를 쓴 당돌해 보이는 사춘기 소녀의 섹스. 나는 소녀의 가족, 학교 선생님, 동년배 친구들 그리고 주위 사람들처럼 백일몽에 휩싸인 그들의 섹스에 집중했다. 아, 당시 청소년이 아닌 것이 얼마나 유쾌했던지... 하지만 마지막 장면, ‘나’는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나요.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소.’ 그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며, 죽는 순간까지 ‘나’를 사랑할 거라며 전화를 끊는다. 서른 살, 한 아이의 엄마였던 나는 그들의 ‘사랑’으로 전율한다.
책 「연인」은 이미지를 내세운 영화보다 ‘나’를 섬세하게 좇는다. ‘나는 슬픔이 바로 내 이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그에게 말한다. 이 슬픔이 내 연인이라고.’(본문 p57) 허구가 가미되었겠지만, 허구로만 느껴지지 않는 가족에 대한 ‘슬픔’, 연상의 용기 없는 남자에 대한 '슬픔’, 그렇게 슬픔이 가득 찬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소녀는 이야기한다. ‘나는 글을 쓰고 싶어요.’ 그리고 소녀는 50여 년이 지나 차분히 가림막을 거두고 「연인」을 쓴다.
뒤늦게 알게 된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연인」이 되기 전의 무기력한 소녀 쉬잔과 그녀를 둘러싼 패잔병들이 보내는 무의식의 SOS다. 모순덩어리인 어머니를, 사냥을 하는 오빠를 사랑해야만 하는 쉬잔. 아직도 무언가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어머니는 쉬잔이 보기에 미친 사람이고, 오빠 조제프가 無力感을 뚫고 나올 방법은 오로지 武力밖에 없다. 시중을 드는 귀머거리 하산과 민병대에게 성매매를 해서 생활을 유지하는 부인 그리고 어느 민병대원의 핏줄인 그들의 딸. 늘 바다(남중국해, 어머니가 고집스레 태평양이라고 부르는 바다)에 속수무책인 굶주린 개간지 사람들, 호화로운 백인들의 거리에 접한 아편과 매음촌. 밀매업자와 타락한 권력의 결탁 등. 주위엔 본받을 만한 삶이란 없는 시간들... 그래서 쉬잔은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린다. 이 책은 은 말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어머니의 죽음으로 끝난다. 비로소 쉬잔의 삶은 시작되리라.
나는 뒤라스처럼 삶의 가림막을 거둬낼 수 있을까? 이런 글쓰기는 용기일까, 사랑일까? 혹은 삶을 복기(復棋)함으로 다다를 치유인가? 새로운 영웅을 맞이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