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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Apr 30. 2024

노숙자는 아무나 되나(1편)

                         

“아이고 추워라, 이걸 어떡하지?

선생님 죄송하지만 전화요금 좀 빌려주세요. 제가 갑자기 이렇게 되었네요. 친구에게 연락하려면 동전이 필요해서요. 제발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내 고향 친구 병준이는 졸지에 노숙자신세가 되었다. 초여름이었지만 새벽시간이라 온몸이 오돌오돌 떨렸다. 어떤 영문인지 사각팬티 한 장만 걸친 맨 몸뚱이였다. 서울역 앞 공중전화부스가 나란히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저 마디 바쁜 걸음으로 오가는 행인들에게 ‘한 푼 줍시오!’를 외치고 있는 모습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겨를마저 없었다. 어서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병준이는 어제 오후 늦은 시각에 충호 모친 상가에 들르고자 지방에서 상경했다. 빈소가 있는 신촌 소재 대학병원 영안실에 고향 친구 여나무명이 모여들었다. 이제 문상문화는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날밤을 새워가며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고스톱경기를 이어가는 일은 별로 구경할 수 없었다. 특히 이 병원이 이런 장례문화의 개선에 앞장서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네댓 명 단위로 분향소에서 문상을 한 친구들은 식당에 차곡차곡 모여들었다. 고인과 상주에 관한 이야기 등이 주된 화제였음은 물론이었다. 저녁 식사를 겸하여 반주로 소주잔이 이미 몇 순배 돌았다. 자정까진 한 시간여밖에 남지 않았다. 각자 보금자리로 당일 중 복귀하기로 한 친구들은 이미 정례식장을 나선 지 오래였다. 강 건너 부락 친구들 여덟은 부천 신도시 아파트에 자리를 잡고 있는 철진이네 아파트에서 하루 묵기로 합의를 보았다.      


멀리 부산 울산 창원은 물론 고향이나 대전에서 이곳에 행차한 친구들이 이 무리엔 섞여 있었다. 우리는 아직 40대 초반의 한창때였다. 상주와 같이 비단강 건너 부락 친구들은 다른 동네 동기들에 견주더라도 담배는 물론 주량에선 누구에게 절대 밀리지 않았다. 이를 대단한 자랑거리로 내세우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던 시절이었다.      


서로 각자 먹고사는 것이 바빴다. 평소 자주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던 고향친구였다. 오늘 충호 모친 문상을 핑계로 모처럼 밤새도록 부어라 마셔라 할 좋은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이런 생각에 이의를 달 친구는 전혀 없었다.      


승용차 두대의 힘을 빌어 주행 끝에 철진이네 아파트 출입문을 들어섰다. 거실 한쪽 벽에 기댄 3단 장식장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두 번째 칸 오른쪽 공간엔 특이하게 뚱뚱한 양주병이 버티고 있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무려 2리터들이 씨바스리갈이었다. 모두 내노라는 애주들이었으나 그중에도 부산에서 올라온 성모는 순간 쾌재를 불렀다. 특히 양주라면  사족을 제대로 쓰지 못할 정도인 친구가 등장했으니 이 양주병은 오늘 밤을 온전히 버텨내기가 어려울 듯했다.

      

그래도 기본 예의는 차리는 우리 고향 친구들이었다. 양주의 병권을 쥔 이 집 주인장의 형식적인 양해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철진아, 오늘 이 양주병 개봉해도 될까?”

철진이가 지난달 해외출장길에 큰 마음먹고 가방에 담아 온 애지중지하던 귀중품이었다. 성모는 애초 철진이의 승낙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오늘 밤엔 이 대용량의 양주병을 비우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 앞에선 철진이의 대답은 그야말로 요식행위에 그쳤다.     

 

주인장 등 우리 친구 일행 8명은 얼음을 섞어 마시는 칵테일 방식엔 아예 관심이 없었다. 허리가 잘룩한 양주전용 두꺼운 유리잔에 따르기가 무섭게 스트레이트로 원샷을 이어갔다. 무려 2리터라는 엄청난 용량의 양주도 우리 애주가들 집중포화에 금세 초토화되었다. 양주병이 바닥을 드러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애주가로 평소 갈고닦은 음주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한판이었다.

    

 나는 내일 대전에서 중요한 점심약속이 있어. 그래서 새벽 4시엔 출발을 해야 서울역에서 첫차를 탈 수 있어.”

 꼭 지켜야 될 약속이 아니라면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와 같이 성모차로  움직여도 될 것 같은데... 대전 고속도로 IC 근처에서 내려주면 되잖아?”

병준이와 선관이는 내일 일정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병준이는 평소 잠이 많았고 결코 썩 부지런한 사람축에 끼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혼자 이른 시각에 출발해야 한다고 여러 번 못을 박았다. 이미 장례식장에서 소주잔이 여러 순배 돌았다. 이후 코스를 이동하여 이곳 철진이네에서 알코올 도수가 뛰어나게 높은 2리터 양주를 들이켰으니 모두는 온전할 리가 없었다.이도 모자라 나중엔 담금주마저 동을 냈다.   

   

술자리는 새벽 2시경에 가까스로 마무리 되었다. 이들 친구 일당들은 이부자리를 제대로 챙기지 않은채 그저 각자 편한 잡초대형으로 거실과 안방 건너방 등으로 흩어졌. 내일 일정을 감안하여 눈을 붙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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