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쉬는 것도 재능인듯해
계획 없이 퇴사(당한 지) 벌써 2주가 되었다.
마침 연말이기도 했고 꽤나 정신없이 바쁘게 시간을 보낸 것 같다.
백수가 된 지 2주 동안 알게 된 점이 있다면,
내가 계속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구조조정을 빌미로 자신 있게 회사를 나왔는데,
막상 퇴사하고 2주 동안은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쉬는 동안을 내가 어떻게 보내야 할지 머릿속으로 무수히 시뮬레이션을 계속 돌린 것 같다.
‘블로그를 부업으로 많이 하던데, 블로그를 시작해 볼까?’
‘시간이 많은 김에 유튜브를 시작해 볼까? 브이로그 같은 건 콘텐츠를 어떻게 짜야하지?’
‘책도 최대한 많이 읽고 싶은데, 그냥 읽고 끝내면 아까우니 독후감을 꾸준히 작성해야지’
‘쉬는 동안 배우고 싶었던 커피도 배워보고, 베이킹도 배워보고 싶은데’
‘게을러지면 안 되니까 운동도 꾸준히 해야지’(갑자기 주 4일을 연속으로 운동 나갔다가 근육통에 이틀을 끙끙 앓았다….)
등등등-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브런치에서 조차도,
진솔하게 내 이야기를 기록하자는 처음 마음과는 다르게, 어떻게 해야 좀 더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지 나도 모르게 계산하고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브런치에 글을 남기기가 힘들어졌다.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가치 있게 남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무의식 중에 계속 수익창출(혹은 콘텐츠 메이킹)을 좇으며, 나에게 계속 채찍질을 하고 있었다.
백수의 삶이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백수로 살 거면 게으르게 보이면 안 된다고- 남들에게 멋지고 갓생으로 보이는 삶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 것 같다.
그러다 문득,
이래서야 회사원이었던 일상에서 달라진 바가 전혀 없다고 생각이 되었다.
아무도 채찍질하지 않는데, 계속 도태되지 말아야 한다는 공포감에 스스로를 압박하고 있었다.
울타리 속의 안정성과 울타리 밖의 자유 중 내가 스스로 저울질해서 결정한 선택인데,
막상 자유를 가져도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니!
18살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던 그 순간부터, 14년간 단 한순간도 쉬어본 적 없이 계속 달리기만 했다.
쉬는 법을 아예 까먹은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남들은 어떻게 쉬는 걸까 ㅋㅋㅋㅋㅋ…..
놀 줄 아는 놈이 제대로 논다고, 쉬는 것도 참 재능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전 직장동료 두 명을 만났다.
두 명 모두 퇴사 후 몇 달간의 공백기를 가졌던 적이 있어, 현재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조언은 ‘내 템포에 맞게, 내 방식대로 쉬라는 것’이었다.
사실 굉장히 뻔한 조언이지만 나에게는 꽤 큰 깨달음이 되었다.
한 명은 모아뒀던 돈에 퇴직금을 더해서 유럽으로 혼자 장기 여행을 다녀왔었다. 그곳에서 정말 많이 생각정리를 하며 인사이트를 얻었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여행 대신 집에서 푹 쉬기만 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요가와 명상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집에서 편히 누워 넷플릭스를 보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고 한다.
둘 모두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지내보기로 했다. 그렇게 지낸 지 일주일이 되어간다.
브런치도 잠시 중단하고, 구인구직 사이트도 일절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출근 걱정 없이 밤새가며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기도 하고, 묵혀두었던 플스 5도 꺼내서 하루종일 원 없이 게임도 해보았다. (여담이지만 <호그와트 레거시> 정말 재미있다!)
최근 핫하다는 <서울의 봄> 영화도 보러 극장에 가고 -평일 낮에 가니 붐비지 않고 참 쾌적했다-, 멀어서 엄두도 못했던 용인 리빙파워센터(가구점)도 드라이브 나가서 알차게 구경했다.
덕분에 고품질의 신혼집 용 침대도 굉장히 저렴하게 구입했다!
내 공백기도 내가 인생에서 정말 행복한 순간이라고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브런치도 조금 더 부담감을 내려놓고, 다이어리 쓰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기록해야겠다.
2024년에는 소소하지만 작은 성공과 행복들로 일상을 가득 채워나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