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베네핏
문학은 인간 생물학에서 제기되는 심리적 도전에 맞서도록 돕는 서술적.감정적 테크놀로지였다. 아울러 인간으로 존재하는 데서 제기되는 의심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발명품이었다.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_26p
과학적 견지에서 말하자면, 인간은 결국 뇌를 이고 산다는 게 문제다. 인간의 뇌는 답할 수도 없는 온갖문제를 제기하고, 온갖 감정에 수시로 휘두린다. 그런 감정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해로운 것들을 탐닉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두려워하며, 노화나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속성에 대해 분노하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_23p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의 저자 앵거스 플레쳐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겪는 모든 문제들에 있어, 문학이 우리에게 어떤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지, 왜 우리가 문학을 필요로 해야하는지 문학이 주는 베네핏, 서술적 테크놀로지를 우리에게 설명한다. 문학을 통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의심과 고통에 맞서, 공감과 치유를 경험하고, 절망과 상처에서 벗어나, 더 나은 자신으로 성장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배우를 꿈꿨던 20대 초반으로 과거여행을 했다. 내가 연기를 배울 때 해보았던 그리스비극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 셰익스피어 햄릿의 '거트루트', 멕베스의 '레이디 멕베스', 장 주네의 하녀들 '쏠랑쥬'.등 다양한 캐릭터를 보고, 연기해보고 했던 추억들을 떠올렸기에 이 책을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듯 하다. 몇 년 전에 보았던 연극,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만나니 반가웠고, 모든 사람들이 익히 알고, 또 배우라고 하는 사람들 모두의 고전, 셰익스피어를 보니 또 반가웠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책에서 나오는 오이디푸스 속 문학적 테크놀로지, 햄릿 속에서의 문학적 테크놀로지, 부조리극 속에 녹아있는 희비극이 신경과학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까지 심도있게 공부하고, 또 뿐만 아니라 가짜기행 소설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지, 사이키델릭의 과학으로 설명 불가능한 우리 존재에 관한 역설, 자기공개를 통한 관계의 연결, 문학 속 테크놀로지를 통해 문화적 규범 범위를 늘려 자기 판단을 줄이는 방법, 문학 속 캐릭터와 플롯을 통해 정신의학적 치유의 사례, 셀프 아이러니를 통한 정서적 회복 등 서평에 담고 싶은 내용이 차고 넘칠 정도로 아주아주 긍정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어나가는 시간 자체가 경이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가히 내 인생책이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을정도다.
1.오이디푸스의 회한과 연민
오이디푸스 연극을 보았을 때의 그 느낌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오이디푸스를 포함한 그리스비극을 접했을 때 당시의 느낌은 '아, 정말 나쁘다! 어떻게 이럴수 있어?'가 아니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 당시를 생각해보니, 신기하게도 나는 캐릭터들의 회한을 통해서 연민을 느끼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오이디푸스를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마음이 뭉클해진다. 오이디푸스의 그 당시 연극 속 마지막 대사는 이것이었다."나는 살았고, 그들을 사랑했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자신의 눈을 찌르는 자기 단죄를 행하고 방황하며 정처없이 떠돌다가 마지막 대사를 한 뒤에 극은 끝난다. 이 말을 듣고 어떻게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소위 '관점 수용 네트워크'에 의해 나는 오이디푸스를 용서하고 분노 같은 부정적인 작용에서의 해방을 경험한 듯하다.(111.p) 오히려, 극이 진행되면서 코러스가 오이디푸스를 위로하듯, 오이디푸스의 안타까움에 연민을 느끼며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들을 느꼈고, 또 이것이 삶 가운데 상처들을 치유할 수 있다는 힘을 부여함을 깨닫는다.
2.햄릿은 우리들의 레어티스다.
햄릿에서의 비극은 햄릿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사실 아버지의 복수를 밍기적거리지 않고 실행해버렸다면, 모두가 죽어버리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쓰면서 생각했던 아들,'햄넷'. 모든 사람들이 아들의 죽음을 기억해달라는 뜻에서 햄릿을 썼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나는 소오름이 끼쳐버렸다. 햄릿이 아버지를 기억하게 하기 위해 연극을 준비했듯이, 셰익스피어도 아들 햄넷의 죽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듯 썼음에 나는 또 경이를 경험했다. 또 셰익스피어 자신과 다른 사람들도 이 극을 통해 슬픔을 덜어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극작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되어졌다. 자신이 쓴 햄릿이, 많은 사람들의 레어티스가 되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이다. 햄릿이 여동생과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레어티스를 보며 죄책감에서 해방되었듯이.
3.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우리는 문학 속 캐릭터들의 독백을 통해 자기 인식을 경험한다. 자기인식, 현출성 네트워크의 자극을 통해 우리는 햄릿이 했던 죽을 것인가,이대로 살 것인가 하는 독백에서 자기동일시와 함께 내적갈등을 경험한다. 햄릿의 내적갈등이 마치 우리가 햄릿이 된듯 고민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인식은 곧 자기보호수단이다.(492.p) 의식없이 흐르는 순간들이 많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시간은 계속 흐르고, 의식하지 않는 순간 속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주체적인 삶을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이유인 듯하다.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그리고 조금 더 의식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소설 속에서 자기동일시를 경험하여 의식적인 주체, 자기 자신의 독립적 주체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4.내면의 문화규범 범위 넓혀 내 자신을 수용하자.
인간은 확증편향의 동물이다. 혼자 있으면 위의 인용구처럼 내가 뇌를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인지라, 여러 편향된 생각들에 사로잡히고, 수치심에 못 견뎌하는 나날들을 떠올려 내 자신이 옳은지 그른지, 기준이 없어 잘못된 자기판단을 하기도 한다. 그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조설근이 장자의 호접몽을 읽고 수치심에서 조금은 해방된 것처럼, 나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내면의 문화규범목록을 늘리면 자기 판단을 줄이고 수용하게 된다. 내가 독서모임을 하면서 성장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사람들이 모여서 나누는 이야기들, 나 또한 나눌 이야기가 있다는 것, 그리고 공유된 모든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 자신들을 인정하게 되고, 내면의 규범 범위를 계속해서 늘려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졌다. 우리 자신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성장하는 발판이 되기 때문이니 말이다.
이 밖에도 문학이 우리에게 주는 베네핏은 넘친다. 서평에 다 담지 못해서 아쉬울 뿐. 사실 책을 읽으면서 재독한 적은 없었는데, 이 책은 꼭 재독해서, 아웃풋을 철저히 해야겠다. 그리고, 당신과 내가 자신을 수용하고,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인식하면서, 삶에 대한 고통 가운데, 인간이기에 겪을 수 밖에 없는 힘듦을 이 책을 통해 이해하고 알고나면 조금은 더 세상이 살만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