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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하늘 May 01. 2024

24. 4. 30.

시계

이 끈적한 고민의 발단은 작년 여름이었다. 지난 7월, 난 부산소방학교 해난구조 교육과정에 입교했다. 학교 내 풀장에서 실시한 입영, 기초수영, 체력 테스트를 시작으로 몸을 달군 뒤 바다로 나갔다. 테트라포드 추락 구조부터 들것 구조, 헬기드랍까지 해상에서 실제로 벌어질 만한 구조 상황을 가정해서 훈련했다. 훈련은 체력적으로도 심적으로도 많은 집중을 요구했기에 매일 훈련을 마치곤 곤죽이 되어 잠들었다. 그만큼 힘겨운 훈련이었지만 동시에 내겐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난 매일 펜을 잡았다. 오늘 내가 했던 훈련, 교육 중 형님, 동생과 나눴던 이야기, 교관님들을 보며 느꼈던 생각들을 일기장에 빠짐없이 적었다. 난 이 소중한 순간을 한 톨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매일 밤 휴게실에 앉아 오늘을 글로 썼다. 꾹꾹 누른 글씨로 흰 종이를 채우고 나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그만큼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한편으론 우울해졌다. 내가 다시 교육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난 화재진압대원이다. 소방은 크게 구조, 구급, 화재진압으로 나뉘는데 각각의 구분마다 맡은 임무가 다르다. 서로의 임무가 달라 채용할 때도 특채, 공채로 구분한다. 내가 받았던 교육은 구조교육으로, 사실 내 임무가 아니다. 엄연히 얘기하면 내가 가야 할 이유가 없다. 이번 교육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구조대에 희망 인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구조교육을 받을수록 흥미가 생기고 더 배우고 싶어졌다. 훈련을 받을수록 '이런 기회를 많이 받을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더 배울 수 있다면'하는 욕심이 생겼다. 공채인 화재진압대원으로 들어와 구조대가 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내가 근무하는 창원은 구조 특채가 많아 현재 구조대에 있는 대원마저도 센터로 보내지는 상황이었다. 현실적인 문제에 마주치자, 고민이 깊어졌다. 어떻게 하면 구조대원이 될 수 있을까. 한숨이 깊어졌고, 일기장 속 글자는 더 움푹 파여 들어갔다.

"짠!" 소주잔이 내는 청량하고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지 않을 것만 같던 훈련 마지막 날 저녁이었다. '시간이 가긴 가는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밤공기를 입속으로 한 움큼 털어 넣었다. 해방감, 뿌듯함, 기쁨과 환희로 몸이 붕 뜬 듯 가벼웠다. 첫날 반장님, 부장님 했던 사이가 힘든 훈련을 버텨내며 형님, 동생으로 바뀌고, 이젠 더할 나위 없는 친구처럼 친근해졌다. 울산, 경북, 경기, 서울, 경남 등 각지에서 만난 우리들은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함께하는 오늘이 다신 오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누구는 소주를 털어 넣고, 누구는 자리를 바꿔가며 수다를 떨고, 누구는 그저 껄껄 웃으며 이 시간을 만끽했다. 그리고 난 결심했다. 구조대원이 되어 다시 한번 이런 순간을 만들어보자고. 수료 후 집으로 돌아온 뒤, 난 홀로 앉아 수료증과 기념 패치를 만지작거렸다. 헛헛한 마음이 가시질 않았다. 차에 시동을 건 뒤 카페에 갔다. 커피 여덟 잔을 포장한 뒤 구조대 문을 두드렸다. "똑똑" 후끈한 날씨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목덜미엔 땀이 맺혔다. 아이스커피 표면엔 땀방울 같은 물줄기가 표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인명 구조사를 따고 싶습니다." 내겐 억겁과 같이 느껴졌던 몇 초가 지나고, 대답이 돌아왔다. "9월에 시험이니 8월부터 같이 훈련하시죠."

그렇게 시작한 시험은 작년 1번의 고배를 마시고 절치부심하여 이번에 합격했다. 첫 번째 시험엔 힘든 줄도 모른 채 그저 설레고 의욕이 넘쳤다. 두 번째 시험엔 잡념이 많아졌다. '이번에도 떨어지면 어쩌지, 저번에 마지막 종목에서 떨어졌으니, 이번에 모두 붙을 거로 생각할 텐데' 하는 불안감, 그리고 워낙 부탁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매번 구조대에 찾아가 훈련장을 써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것, 센터엔 없는 장비를 빌리려 부탁하는 것. 지금에야 끝났으니, 그것들이 적당한 온도로 느껴지지만 당시 저 일들이 얼마나 내 어깨를 꽉 잡고 무겁게 짓누르던지. 그럴 때마다 난 무조건 붙자고 속으로 끝없이 다짐했다. 그 간절함 때문인지 마침내 이번에 끝매듭을 지었다. 내게 힘이 되어준 모두에게 감사하다. 그땐 축축하고 무거운 불안에 덮여있던 때여서 당신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마침내 멈췄던 내 시계가 돌아간다. 시계에 다시 생기가 돈다. 차갑게 식었던 초침이, 분침이, 시침이 뜨겁게 움직인다. 똑딱똑딱, 안온하고도 힘찬 음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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