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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Nov 02. 2023

우산 15개를 버렸다

내 돈 주고

 예보는 있지만 막상 비가 오지 않는 날, 잠시 망설이게 된다.


'아, 우산을 들고나가야 하나.'


아무래도 가방이 작아서 우산이 안 들어갈 것 같다. 비도 안 오는데 우산을 손에 들고 다니는 건 번거로운 일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그냥 나가자. 비 오면 편의점에서 하나 사지 뭐."


편의점은 지하철 역사마다 하나씩 있고, 오가는 길목에서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기에 비가 온다 해서 당황할 일은 없을 것이다. 비닐 우산의 경우 몇 천 원으로 구매가 가능하니 가격적으로도  부담되지 않는 수준이다. 가볍게 들 수 있는 작은 가방을 선호하고, 성격마저 덤벙대는 편이라 우산을 챙겨 다니는 것보다는 비가 오지 않을 확률에 기대는 쪽이 마음 편하다.


그러나 이렇게 방심하는 날엔 어김 없이 비가 온다. 편의점에 들러 비닐 우산을 산다.



어느 날 신발장을 여는데 세워져 있던 우산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공간에 비해 우산이 지나치게 많아서 일부는 문에 기대어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좁아터져서 숨쉬기 힘들다고 옥신각신 해오던 차에 내가 문을 열어 쏟아져 나왔나 보다.


하나씩 일으켜 세우며 살펴보니 상당수는 편의점표 비닐 우산 또는 망가져서 일단 넣어둔 것들이었다. 평소에 자주 사용하는 우산들은 별도의 우산 꽂이에 넣어두기 때문에 급히 사거나 고장 난 것들은 눈 가리고 아웅 하려는 주인장의 의도대로 신발장 안으로 빨려 들어간 모양새다. 그렇게 한 개 두 개씩 쌓여 폭발 직전까지 이른 것이다.  


넉넉한 공간으로 보관 장소를 옮겨본 들 앞으로도 계속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비워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근데, 이거 어디에 어떻게 버려야 하지? 재활용은 되는 걸까?'


우산 비움은 처음이라 관리사무소에 물어보기로 했다.


"우산은 종량제 봉투에 버리시면 안 되고요. 분리수거 대상도 아니에요. 수거 업체에 전화해서 폐기 절차 밟으셔야 합니다."


내친김에 수거 업체에도 연락을 해보았다.


"장우산은 개당 천 원이고요, 접이식은 500원이에요. 아동용은 무상입니다. 몇 개 버리세요?"


오 마이 갓. 내 돈 내고 내가 버려야 하는 것이었다니. 돈을 그냥 길바닥에 버리는 셈이다. 살 때 몇 천 원 내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버릴 때 단돈 천 원은 이렇게나 아까운 것이다. 아동용 우산이 무상 수거된다는 점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여전히 속은 쓰렸다.


필요 없는 우산은 총 15개였고, 그중 아동용은 2개니까 "내 돈 주고" 처분할 대상은 13개였다. 장우산 10개에 접이식 3개, 도합 11,500원이 길바닥에 버려졌다. 부끄러움과 죄책감은 덤이었다.

처분 대기중인 우산들

며칠 전 도서관에 가려고 주민센터 로비로 들어서는데, 여러 명이 우산을 들고 줄을 서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우산 무상 수리 해드립니다."라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 세상에도 우산 수리 서비스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딸이 아끼는 우산 중에 살이 부러져서 사용하지 못하는 녀석이 생각났다.


간이 테이블에서 뚱땅뚱땅 우산을 고치고 계시는 기사님께 서비스 시간이 몇 시까지인지 여쭤보니, "오늘 수리 건이 많아서 접수는 곧 마감될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걸음 몇 발작 또는 클릭 몇 번으로 원하는 것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시대에 이렇게 물건을 고쳐 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다시 한번 놀랐다. 망가진 우산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수리 날짜에 맞춰 챙겨 나와 차례를 기다려야 하는 건 불편하고 귀찮은 일일 텐데, 우산을 꼭 쥐고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오히려 느긋한 향기가 풍겼다. 풍요에 편승하는 대신 물건을 아끼는 마음을 선택한 그들에게서 아등바등하는 절약의 정신이 아닌, 여유로운 당당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반면 편리에 기대어 쉽게 소비해 버린 나에게 남은 건 돈을 향한 아쉬움과 환경에 대한 미안함 뿐이었다. 버려서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마음만 불편해졌다. 그래도 한 가지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비가 올까 말까 애매한 날 우산을 챙겨 들고 다니는 것이 귀찮아도 그나마 마음은 덜 불편하다는 점이었다. 마음이 덜 불편한 불편에 조금은 너그러워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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