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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라미 Nov 04. 2023

내 친구의 인생 2막을 응원합니다.

마흔의 새 출발

그때, 내 나이는 마흔이었다.


아이들이 자기만의 우주를 만들기 시작할 무렵. 비로소 육아 해방을 맛보며 편히 살 수 있겠거니 했는데, 하필이면 마흔이 되었.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앞자리에 4가 따라다녔다. 4는 생각보다 무겁고 거칠었다.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만큼, 만질 때마다 멈칫할 만큼.


막막함과 두려움에 연민까지 얽히고설켜버린 마음을 붙잡고 호되게 앓았다. 그러다 깨달았다. 세월을 수용하지 못하는 마흔 앓이는 약도 없는 불치병에 승산도 없는 게임이란 걸. 이미 붉은 빛깔로 물들기 시작한 4는 결코 푸르던 시절로 되돌아갈 마음이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 지나온 길에 미련 두지 말고, 앞으로 걷자. 자꾸 돌아보지 말고 제대로 걷자. 


마흔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내면의 나는 좀 더 자유롭고, 좀 더 균형 있는 삶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스스로 멱살을 부여잡고 질질 끌고 가는 회사부터 그만두기로 했다.


남편 역시 본인의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한 때는 마흔부터였다. 다만, 나처럼 질척거리는 마흔 앓이가 아닌 푸르던 시절과의 쿨한 결별을 선택했다. 결정이 워낙 시원시원한 나머지 옆에 있던 내 마음까지 홀가분할 정도였다. 눈을 깜빡하니 그는 어느새 회사를 그만두고 자영업자로 변신해 있었다.


남편은 회사를 그만두면서 다시는 직장 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회사가 싫은 것도 아니고 사람이 싫은 것도 아니라 했다. 그저, 시간과 일을 스스로 컨트롤하면서 사는 삶을 꿈꾼다고 했다.


아내 된 입장에서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릴 수도 있었다.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고 느긋하게 기대앉을 수 있을 만큼 안락하며, 사람도 일도 익숙해서 불안도 염려도 없는데 도대체 왜 편안한 곳을 박차고 나오느냐고 말이다. 10명 중에 한 두 명 살아남는 자영업이 어디 그리 말처럼 쉽냐고 반문하며, 자다가 봉창 두드리지 말고 조신하게 다음 월급날을 기다려보자고 타이르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왠지 나는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잘 될 거라는 긍정적인 믿음이나 새로운 환경에 대한 희망 섞인 기대는 아니었다. 그저, 같은 마흔 지기로서, 그의 마음 존중하고 싶었다. 그 결은 찐한 우정에 가까웠다. 비록 겉으로 보이는 마흔의 열병은 없었다 하더라도 15년 가까이 얌전히 한 직장에 다니던 사람이 쿨하게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뜨거운 열정을 품어야 했을까를 먼저 생각했다.


해뜨기 전 맞이하는 차가운 출근길에서, 까만 어둠이 내리는 스산한 퇴근길에서 마흔 이후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에게도 원하는 삶의 모양에 대한 갈망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전업 이후, 그에게 행복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행복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이 행복이라면 행복한 것 같아"


평화로운 동네를 구경 삼아 힐링하며 출근하고, 오픈 준비가 끝나면 아메리카노 한잔 하면서 간이 의자에 앉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캐주얼 게임도 즐길 수 있다.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SNS에 오픈 시간 변경 공지를 올리고는  시간 더 누워 있다가 출근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다. 일을 좀 일찍 마치고 싶은 날에는 문 앞에 안내문을 붙여 놓으면 된다. 확실히 본인 시간을 스스로 컨트롤 수 있다.


하지만 평일에는 혼자 운영하기에 화장실도 제 때 못 가고, 갑자기 손님이 몰릴 때면 멘붕이 오기도 한다. 열심히 응대를 해도 주문한 음식이 너무 늦게 나온다는 불만의 소리를 듣기도 하며, 예고 없이 커피 머신이 고장 난 날이나 에어컨에서 물이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손님들에게도 일일이 안내를 해야 한다. 마지막 손님이 나 후에는 바닥에 제멋대로 흐트러진 매장 용품들을 다시 정리해 두고, 누군가가 바닥에 흘려놓고 도망간 찐득한 음료를 닦아내기도 한다.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의 연속이며,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럼에도 그는 때론 화가 잔뜩 나게 되는 상황들 조차 행복이라 여겨지는 날들 안으로 쏙 넣어버린다.


물론 직장인 시절에도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은 있었을 것이다. 상사에게 인정받고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기분이 들 때, 승진해서 축하 인사를 받을 때, 업무가 잘 추진되어서 성과가 좋을 때, 월급이 올랐을 때, 인센티브를 많이 받았을 때, 술 한잔 하며 으쌰으쌰 할 때도 분명 펄떡이는 삶을 느꼈을 테니까.


하지만 이는 본인이 결정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 얻는 행복의 머묾이 아닌, 누군가 인정을 해줘야 얻을 수 있는 행복의 찰나다. 순간의 행복들은 이슬처럼 사라졌다. 본인은 업무를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상사는 다시 해야 한다고 했고, 승진을 하면 그만큼 더 좋은 퍼포먼스를 요구했다. 출근한 자리에는 술 한잔으로 털어버린 줄 알았던 돌덩이가 다시 얹어진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으리라.


현재 남편은 스스로 인정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내 친구의 인생 2막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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