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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니마을 Apr 17. 2023

화작(化作)

"무슨 일을 하세요?"

"오징어 장사 합니다."

"......"

기대한 대답을 듣지 못한 탓인지 약간은 기분 나쁜 듯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처음 간 술집 주모가 흰자위를 해뜩해뜩하며 쳐다본다. 참 자주 듣는 질문이다. 사람이 누구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다른 것에 앞서 무슨 일에 종사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 사람을 가장 빨리 알 수 있는 방편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옆집에 그릇이 몇 개이며 젓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아야 하는 약간은 극성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다. 오고 가는 말에서 그 사람의 생각을 알고 삶의 태도를 엿보는 것이 순리이나 호기심이 지나치게 많아 시시콜콜 신상조사를 하는 것이 다반사다. 포장마차나 선술집에서 직업에 상관없이 오가며 만나는 사람끼리 그냥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를 통해 하루의 쌓인 피로를 풀고 싶을 때가 많다. 무슨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소소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하루의 노고를 털어내는 일이나 일상의 빡빡한 대화에서 벗어난 편안한 대화는 더 좋은 활력을 불어넣는 재활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면 선입견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는 말 그대로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신기루를 만들거나 직업이란 가면으로 그 사람들을 치장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나의 모습이 늘 새로운 모습으로 비치길 바랬고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느 단골집에서 주인장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아는데 3년 정도 걸렸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왜 그렇게 직업을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사람이 그 자리에 가면 그 자리에 맞는 일에 열중하면 될 것을 내가 무슨 일을 하는 것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도리어 물었다. 꽉 조인 허리띠를 풀 듯, 하루 피로를 풀어헤치고 친구들과 어울려, 때론 낄낄거리기도 하고, 때론 복잡한 심사를 정리도 하는 시간을 갖는 나만의 자유인 것이다. 그런 시간을 직업이나 다른 일을 연장하여 혼자만의 유희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 까닭으로 술집에 오면 술 마시는 술꾼으로서 제 역할을 잘하면 된다는 것이 평소의 술꾼론이기도 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대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동네방네 현수막까지 내걸린 무슨 클럽의 모임 뒤풀이를 한다는데, 어찌나 유세를 떨고 시끄럽게 구는지 같은 장소에서 있는 것조차 민망하고 창피하여 자리를 뜬 적도 있다. 평소 지론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직업이 주는 이득과 선입견 덕분에 그런대로 대접을 받고 사는 것이다.


직업을 묻는 이에게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도리어 ‘무슨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냐’고 자주 묻는다. 그 답이 알록달록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물이 사각형에 담기면 사각형이 되고 구에 담으면 구가되듯이, 처해진 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상대방에게 가장 편한 친구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바람은 그저 욕심뿐 인지 다양한 색깔을 꿈꾼 지 벌써 세월이라 해도 될 만한 시간이 지났건만 상대가 이야기하는 직업군은 색깔이 비슷비슷하다. 오래된 지인을 만나보면 직업에서 오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경우를 허다하게 본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선배는 아이의 학부모로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갔는데 다른 부모가 지날 때는 인사를 하지 않던 학생들이 자기가 지나가니까 학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인사를 하더란다. 재학시절에 매우 유순하고 착하기만 했던 고등학교 친구를 몇 년 전에 동창모임에서 봤는데 걸어오는 폼이 영락없이 '나는 경찰이다'라고 적혀 있다. 어디 이 친구 하나뿐이겠는가? 다양한 직업군을 가지는 모임을 가보면 세월 탓인지 하는 일에 따라 삶의 태도가 많이 굳어져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온몸으로 광고를 하고 다닌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중간 평가인 셈이고 자기반성을 얼굴에 담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불혹이라는 말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말 그대로 주변의 어떤 말에 쉽게 미혹되지 않는다는 나이 아닌가. 사십이란 나이는 농경 사회에서는 대략 60살의 인생에서 후반부를 시작하는 시기가 된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그동안 자신이 이루어 논 가족의 틀을 자식에게 물려줄 준비를 시작하는 나이다. 그 행동이나 처신이 어찌 가벼울 수가 있겠는가? 제대로 산 사람이라면 이 나이가 되면 풍기는 것이 자신의 직업과 무관치 않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는 삶은 대하는 태도의 진중함을 뜻한다. 물론 오늘날 사회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다 보니 옛날처럼 나이 사십이 사회적으로 기틀을 마련하고 뿌리를 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나이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옛날 불혹이란 말이 무색해진 느낌이 많다. 그럼에도 나이 사십에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삶의 자기반성은 필요해 보인다. 얼굴에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는 자기반성과 직업을 광고하는 몸짓과 말뽐새를 별개의 문제라고 본다. 이는 얼핏 같은 뜻인 듯하나 다른 것이라 보는 이유는 전자는 삶을 대하는 자세의 결과인 것이고 후자는 행동양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해진 환경에 잘 동화하는 것, 즉 젖은 땀을 흘리며 뙤약볕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노동자처럼,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전문직을 가진 사람들의 모양새를 하고 시장에 가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같이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심상의 폭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불교용어로 화작(化作)이라고 한다. 젊은 시절에 나름대로의 치기로 제법 거창하게 화작이라는 용어를 몰랐지만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였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을 돌아보니 그건 어디까지나 욕심이라는 생각을 한다. 설사 지금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머리로 하는 연극일 뿐, 마음으로 몸으로 익혀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얼굴과 세치 혀로 흉내를 내는 것이다. 몸소 겪어 보지 못한 인생길을 안다는 것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스스로 가지 않은 길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어려운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와 같이 그 길을 바라본 만큼만 이해하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과 보이지 않는 그 길은 다른 경험으로 비추어 짐작하는 일일 것이다.


그 한계를 잘 알면서도 여전히 누구와 이야기를 해도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픈 욕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불혹이라는 삶의 태도와 화작이라는 행동강령을 가진다면 평온과 풍성함이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이 될 것이 아닌가. 사람을 재단하지 않고 그 사람의 눈을 가져보는 일, 그 사람의 심장을 가져보는 일은 너무 메말라 있는 오늘날 세상살이에 촉촉한 비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본다. 소나기나 시원스럽게 내려야만 비라고 하던가. 비같이 않지만 온 누리를 적셔주는 소리 없는 비도 많은 법이다. 화작(化作)이 일반인을 만나서 그 흉내라도 낸다면 그 또한 그 거룩한 뜻이 싹을 틔우지 않겠는가?


[계간 에세이문예 2012 가을호]

- 오래된 글을 다시 보니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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