횟수로 가장 오래된 친구와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14살에 만난 그녀와 처음 가는 긴 여행이 될 테다. 긴 여행이라고 해봤자 고작 일주일이지만 이마저도 우리에겐 처음 있는 일이다. 이십 대엔 각자의 애인을 데리고 1박 2일로 가평을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갔던 애인이 각자의 남편이 될 거라고 예상했으려나. 견고하게 쌓았다고 착각한 울타리는 부서지기를 수차례였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울타리를 지켜내지 못하더라도 너와 나의 우정은 변함이 없을 거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마음으로 나눈 우정은 옅어지는 법이 없다. 사랑보다 진하고 완전하다는 걸 나는 내 곁의 몇 안 되는 친구들을 통해 배운다. 삼십 대를 한 해 남겨두고 그녀는 첫 아이를 가졌고, 둥글게 부른 배를 하고서 떠났던 여행이 두 번째였다. 한 여름 계곡에 담갔던 6개의 발 중에 단 두 개의 발만이 내 발 옆에 남았다.
우린 긴 시간을 함께 했지만, 긴 일상을 함께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내가 힘들 땐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내게 꺼내지 못했고, 그녀가 힘들 땐 내 행복을 그녀에게 꺼내지 못했다. 미안함도 고마움도 크게 표현하지 않았다. 우린 참 말이 없었는데, 나는 그것이 서로를 위한다고 생각했고 그녀는 가끔 그것이 못내 서운했었다고 했다.
무엇을 하며 이토록 고운 우정을 지켜 온 것인지 물음표가 쌓인다. 그는 내 인생에서 '첫' 번째 진짜 친구였다. 계절이 바뀌어도 우직한 나무처럼 서로의 자리를 지켜낸 우정이다. 일상을 산다는 건 변하는 계절조차 느끼지 못한 채 지나고 만 하루 앞에 서 있는 것이었으니까. 계절에 연연하지 않고 불쑥 내민 마음에 밤낮을 따지지 않고 공들인 시간 없이 태초부터 가졌을지 모를 마음이 단번에 떠오르는 친구였다.
도서관에 가서 여행지에 대한 공부를 하고, 여럿이 함께 묵는 도미토리는 어떠냐고 물어 오고, 먹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큰 마켓이 일요일에 열리니 일요일엔 꼭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 타이트한 여행보다 느긋한 여행이 좋고, 비행시간을 착각해서 몇 만 원을 물었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낯설면서 좋았다. 무엇보다 큰 사건을 묵묵히 떠안고 비척비척 걸으며 텁텁한 공기를 내내 마신 그녀에게 이 번 일주일이 정말 오랜만에 가져보는 행복한 환기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아침 10:30분은 러닝머신 위에 있는 시간이다. 땀에 젖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내게 중고등학교 때 늘 들었던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영장이 있는 숙소를 예약했으니 수영복도 챙기고, 트레킹도 할 생각이 있으니 운동복도 챙기면 좋겠어. 두터운 점퍼도 꼭 챙겨. 넌 꼭 하지 않아도 되니까, 알고만 있으라고"
처음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의 목소리처럼 붕붕 떠올랐다. 그 무엇도 담기지 않은 깨끗한 목소리. 잊고 있었던 학창 시절의 그녀의 목소리. 말소리에 무엇도 담기지 않았던 목소리. 두려움, 걱정, 슬픔조차 침범하지 못했던 목소리. 그녀만 가졌던 탁월한 목소리였다.
칼칼해진 목소리에 울음이 차올라 자꾸 떨어지는 눈물을 거두던 너,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불행이 일상 속에 파고드는 것을 퍽퍽하게 밟고서 그가 순간순간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계절을 잊을 정도로 안부를 묻지 않던 내가 자꾸 그녀의 안부를 묻는 것도 너무 걱정한다고 생각할까 봐 들었던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가슴에 커다란 상처가 생긴 뒤로 매일 울었던 너를 보고 돌아와서 나도 그날 밤엔 목이 메었다.
그는 학창 시절의 불행을 자신의 목소리에 담지 않던 애였다. 그녀완 달리 나는 언제 어디서든 내 불행을 들키고 목소리에 담고 얼굴에 묻히고 다녔다. 나는 그녀의 깨끗한 목소리를 기억해 냈고, 오늘 그 목소리를 듣고 놀랍도록 반가워 하마터면 러닝머신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응 알겠어. B로 가는 비행기는 있어? 내가 찾아보니 없더라고"
"아니 스카이스캐너엔 없더라. 내가 한 번 더 찾아볼게"
보지 않아도 보이는 얼굴은 목소리가 만든다. 웃고 있어도 진짜 웃음은 결국 목소리가 완성하는 것처럼.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웃는 목소리와 웃는 표정이 나를 이토록 기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