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처음 호흡수행을 했을때는 물이 내 그릇에 가득차게 하는 연상과 함께 호흡을 연결지었었어요.
기운을 감지하게 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인 것인데, 그것이 물이든, 불이든, 누군가의 손길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죠.
티벳의 관상수행이 그런 것인데요, 불보살님을 떠올려 그것과 교감하려는 훈련이 상상으로 자리하게 하지않고,
여실히 바라보다보면 내 안에서 실제로 가능하게 되는 것과 동일합니다.
혹자는 오직 상상의 발현이라고만 하겠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는 상상으로 이뤄내는 집착의 길과
내 안에서 가르침들과 실제함으로 체험되는 길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상상으로 이뤄진 것과 가르침과 함께한 현상이 뭐가 다를까요. 얼핏보면 현상은 비슷하기에 자칫, 착각의 길로
나아갈 수도 있어요.
어떤 결과물을 위해 상상해서 이뤄진 것에는 욕심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 욕심으로 일정부분의 효과를 내다가
다른 결과물을 내지 못하게 되면, 조바심과 수행 전보다 에고가 더 크게 자리하게 된다는 점이 큰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그럼, 실제로의 체험으로 이뤄진 경우에는 어떨까요.
수행의 방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욕심과 조바심을 배제하고 그저 시선을 기울이면 된다는 방법의 터득과
에고가 자리했다가도 그 방법을 터득한 경험으로 다시금 조율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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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이든 실제든지 그런 수행이 전혀 되지 않는 사람들은 왜 그런 것일까요?
방법상에 문제보다 그 방법을 내 안에서 적용하는 법이 아직 터득되지않아서 그럴겁니다.
내 안에서 적용된다는 것은 어떤 기술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운동처럼 어떤 기구의 사용법을 알고, 운동을 한다고 해도,
자기 체형에 맞게 기구의 쓰임을 스스로 운동해가면서
적용, 관찰해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들이 남아있어서지
불가능한게 아닙니다.
운동도 조바심을 내면, 관절에 무리가 오고, 원하는 몸을 만들지 못할뿐더러
다시는 운동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되기도 하듯이,
마음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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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파욱에 갔을때, 한 거사가
눈이 벌게져서 자신의 호흡관찰한 경험들을 인터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찌나 재미나게 이야기하는지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듣다보니 그는 눈을 감았을때 잔상의 빛들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해서, 호흡을 육신의 눈으로 보려는 욕심이,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경험해본 사람이면 듣는 즉시 알게됩니다.
당연히 인터뷰하는 스님이 호흡을 바라보는 방법을 다시 설명해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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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어머니는 기도, 화두참선, 호흡수행을 각각 오랜기간 수행을 해 오셨습니다.
참선과 호흡이 뭔지 모르시고, 기도에 열중하신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다라니 기도때 하늘에서 그릇이 내려와 단전자리에 쑥 들어가더니 단전과 허리가 훈훈해지는
체험을 하게되었었죠.
단전호흡을 한게 아닌데도 그런 체험을 해서 그 당시는 어머니가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신기해 하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상상을 한 것도, 심상을 떠올린 관상수행을 한 것도 아닌데,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호흡수행도 그런 방식으로 해야합니다.
그저 호흡만 바라보고 수행하시면 됩니다. 무엇을 이루려는 마음없이 진행하면
그 현상들이 저절로 일어나 계속 진행해나가면 되는 일련의 순간들이 찾아옵니다.
그 현상들이 절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하는 경험들을 그렇게 겪고 가는 것이지,
상상해서 지나가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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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으로 이뤄낸 것들은 스스로에게 절대화해서, 공부를 과정에 있게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게 하지만,
가르침과 함께 한 실제들은, 다시 나를 걷게하는 길로 안내하게 됩니다.
내 체험에 묶이지 않고,
늘 수행함으로 자리하고 있는지 바라보시고,
그 수행함이 사라진 자리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점도 참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내려놓은 마음뜰 안에는 언제나 봄
어라의 라이프카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