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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계일주 Nov 24. 2023

결혼 19년 차에 알게 되었다

일상 15. 가진 것 없는 남자와 가진 것 없는 여자


가진 것 없는 서른하나 남자와 가진 것 없는 스물일곱 여자가 만나 결혼을 했다. 11월 21일. 결혼식 아침부터 눈이 내렸다. 축하해 주러 온 하객들은 결혼하는 날 눈이 오면 잘 산다더라는 난 처음 듣지만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미신에 진심인 엄마가 이날이 길일이라며 잡아온 날이었다. 미신은 미신일 뿐이라던 신부는 결혼식 날 신부가 울면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울지 않았다.





남편은 무채를 썰었다. 어머니는 고춧가루, 새우젓, 까나리 액젓, 찹쌀 풀, 생강 마늘 양파 간 것, 갓, 쪽파, 대파 등을 눈대중으로 휘휘 부어 간을 맞춰주셨다. 남편이 무와 갖은양념을 버무려 김장 속을 만든 후, 아이들도 고무장갑 끼고 앉아 함께 김장 속을 넣었다. 



김장 속을 넣던 남편이 눈치 없이 말했다. "엄마. 나 결혼 잘했지? 우리 봄이 엄마처럼 좋은 며느리가 어디 있어. 그렇지?" 어머니 표정이 마뜩잖다. 별 대꾸가 없으면 그만해야 하는데 남편은 또 "아마 아버지도 계셨으면 며느리 엄청 이뻐했을 거야. 그렇지? 엄마?"라고 말한다.



난 속에 없는 말을 하며 살갑게 대한다거나 붙임성 있는 편이 아니라 이쁨 받는 며느리상은 아닌데. 남편이 일부러 비꼬아서 말하는 건지. 잠시 정적이 흐른다. 어머님이 딱히 반응이 없자 남편이 또 무리수를 던진다.



회사에서 일로 만나는 사람들이 애가 넷이라는 말만 해도 '결혼 잘하셨네요. 아내분에게 잘하셔야겠어요.'라는 말을 듣는다며. 나는 눈짓으로 이제 그만 좀 하지라는 무언의 제지를 했으나 나를 골탕 먹을 작정인지 남들 안 한다는 김장을 하니 고마워서인지 쓸데없는 과한 칭찬을 남발한다. 오히려 그게 독임을 금쪽이 남편은 정작 모르고 있다.







결혼 19년 차. 이렇게나 오래 살았다. 우리 엄마가 길일이라고 받아 온 좋은 날에 결혼식을 해서 그런지, 그날 눈이 내려서 그런지, 신부가 울지 않아서 그런지, 딸 셋에 아들도 하나 낳고 김장도 담그며 아직까지 같이 지지고 볶으며 살고 있다.



결혼하는 날도 눈물 꾹 참고 울지 않았는데 결혼하고 생판 모르는 곳에 와서 아이 낳고 키우며 지내면서는 많이도 울었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 멘붕이었던 독박 육아. 된장찌개 하나도 못 끓이던 어설픈 살림 실력.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워킹맘으로 살다 보니 일도 육아도 살림도 엉망이었다. 무엇 하나 똑 부러지게 못하고 뚝딱거리는 건 여전하다. 살면서 속도 많이 썩였던, 가진 것 없는 그 남자도 고생이 많았다. 돌아보니 미안한 마음도 든다. 늘어나는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한 번도 쉬지 못했다. 무엇보다 나는 자주 아팠는데 남편이 건강해서 감사했다. 



부모가 되고 보니 내가 아니면 안 됐던 순간들, 또 남편이 없으면 못했던 일들이 있었다. 육아는 로그아웃할 수 없다는 게 힘든 거라고 예능에서 누가 그랬다. 맞다. 육아로 로그아웃할 수 없기에 정신줄을 붙들고 살았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꼭 해야 할 일이라던가. 바르게 살아야 할 이유라던가 말이다. 



글을 쓰다 보니 남편한테 서운한데 고맙기도 하고, 짜증 나는데 짠하면서 애틋한 마음도 든다. 사는 동안 늘어난 주름과 나이, 배 둘레, 흰머리, 또 우리 아이들을 오롯이 끌어안아 줄 수 있는 건 그 남자뿐이라는 걸 결혼 19년 차에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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