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7시에 수능 시험장에 간 봄이가 우산을 안 가져갔는데 점심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수능 끝나는 시간에 맞춰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갔다. 학교 앞은 이미 마중 나온 학부모들로 붐볐다. 꽃다발을 들고 온 분도 계셨는데 내 손엔 우산 달랑 하나. 대신 끌어안아 줄 마음은 한 아름 들고 왔다.
11월 중순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학교 담장 주변에 이제 올해의 마지막일 것 같은 장미가 피어있었다.
학교 담장 너머로 수능 시험이 끝났음을 알리는 방송이 들렸다. 봄이는 아마 성향상 늦게 나올 것이다. 첫 번째 아이가 나오고, 두 번째 세 번째... 그러다가 우르르 아이들이 교문 쪽으로 걸어 나왔다. 무채색 점퍼와 무거운 가방을 메고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과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이제 끝났다는 후련함일 것이다. 시험의 결과는 나중 일이고. 저마다 마중 나온 부모님과 함께 우산을 쓰고 멀어졌다.
우리도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여러 번 건너 가족들과 약속한 외식 장소로 갔다. 봄이가 점심 도시락을 안 싸가는 대신 초콜릿을 먹었는데 4교시 시험 시작부터 배가 고팠다고 한다. 그럼에도 점심 먹어서 속이 더부룩한 것보다는 장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었다고. 긴장하면 소화도 안 되는 장 컨디션은 나를 닮은 모양이다.
남편이 이제 시험도 끝났고 곧 스무 살이니 맥주 한 잔 정도는 먹어도 된다며 봄이에게 축하주라며 건넸다. 봄이는 맥주 마시고 취하면 어쩌냐고 걱정했는데 예상과 달리 아무렇지 않았다. 첫 맥주의 후기는 오히려 급하게 먹은 음식이 쓱 내려가는 느낌이라 좋았다고. 큰일이다. 술 컨디션은 아빠를 닮은 모양이다.
2023.11.17. 금요일. 첫눈
오늘 아침에 '자기의 이유로 살아라' 이웃님 블로그에서 수능 필적 확인 문구를 담은 글을 읽었다. 수능 시험지에 해마다 문구가 실리나 보다. 오늘 처음 알았다. 그중에 봄이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두 가지를 기록해 본다.
나태주 시인님의 '들길을 걸으며'. 2021년 수능 필적 확인 문구였다고 한다. 수능시험을 치르는 아이들이 이 글을 읽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따스했을까. 괜찮다며 충분하다며 덜컥 안아주는 것 같아 뭉클하다.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다.
"세상에 와
그대를 만난 건
내게 얼마나 행운이었나
그대 생각
내게 머물므로
나의 세상은
따뜻한 세상
빛나는 세상이 됩니다"
- 2014. 나태주 -
봄이 덕분에.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덕분에 내 삶이 따뜻했고 빛났음을 알고 있다. 봄이는 이번 수능은 망했다고 했다. 아마 모든 수험생이 그렇게 느꼈을 거니 결과가 어떻게 되든 이 시험이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임을 알려주었다.
올해의 필적 문구는 '양광모'시인의 '가장 넓은 길'이라고 한다. 세상에.. 나 혼자 읽다가 괜히 눈물이 났다. 글이란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나 보다. 봄이에게 꼭 전해줘야겠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다.
< 가장 넓은 길 - 양광모 시인 >
"살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원망하지 말고 기다려라.
눈에 덮였다고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요.
어둠에 묻혔다고
길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다."
- 양광모, 2024년 수능 필적 확인 문구 -
며칠 글을 쓰지 못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사람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마음이 꼼짝 마였다. 눈에 덮였다고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어둠에 묻혔다고 길이 사라진 것도 아니라고 한다.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거라는 시의 글귀가 내 마음속 염려와 불안도 빗자루로 싹싹 쓸고 간 것만 같다. 마음을 쓸어주는 글이다.
날이 축축하니 점심에는 뜨끈한 우동을 먹으러 갔다. 첫눈이었는데 그새 그치다니 아쉬웠다. 어젯밤에는 내일 김장을 해야 해서 욕조에 한가득 담긴 무를 닦았다. 매해 사진을 찍어 일기에 남겼는데 어제는 사진 찍을 겨를도 없이 흙이 잔뜩 묻은 무를 닦고 잠이 들었다. 오늘은 김장에 들어갈 재료 준비를 해놓고, 내일도 아마 겨를 없이 김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