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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계일주 Nov 30. 2023

모순

독서 14.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모순 / 양귀자 장편소설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레 변해버린 요즘, 불안하고 당황스럽기만 한 시절에, 소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용기를 잃고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무언가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어 이 소설을 시작했으나, 모순으로 얽힌 이 삶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307p. 양귀자  1998.6.27





★모순 1판 발행 1998. 6.27

저자 양귀자 / 출판 쓰다 / 발매 2013.04.01



저자 소개 : 양귀자


1955년 전주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8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온 이후, 소설집 <귀머거리 새>, <원미동 사람들>, <슬픔도 힘이 된다>,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을>, 장편소설 <희망>,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천년의 사랑>, <모순>을. 장편동화 <누리야 누리야 뭐 하니>와 산문집 < 따뜻한 내 집 창밖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삶의 묘약>, <부엌신>, <엄마노릇 마흔일곱 가지> 등을 펴냈다. 유주현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21세기 문학상을 수상했다.






필사하고 싶은 문장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15p.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21p.



인생이란 더하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까먹기도 있다는 사실 44p.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삶은 아버지의 것이었고 어머니의 삶은 어머니의 것이었다. 나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은 아무리 어머니라 해도 예의에 벗어나는 질문이었다. 51p.



어머니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 집에 아주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이다. 책의 내용은 일어나는 혹은 일어난 일의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된다. 62p.



나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화살표가 어긋날 것을 두려워하는 출연자들이 최선책보다 차선책을 더 많이 선택한다는 것을. 101p.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 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127p.



"양보? 네가 양보한 것이 무엇인 줄 알기나 해?"

너는 이 지긋지긋한 불행을 내게 양보한 대신 알짜만 가득한 행복을 넘겨받은 것이라고. 132p.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142p.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152p.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다. 157p.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173p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188p.



세상의 숨겨진 진실들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마치 평생 똑같은 식단으로 밥을 먹어야 하는 식이요법 환자의 불행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227p.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229p.



이모가 죽고도 세월은 흘렀다. 이모를 죽인 겨울이 지나고 봄은 무르익어서 사방에 꽃향기가 난만했다. 겨울이 있어 봄도 있다. 나도 세월을 따라 살아갔다. 살아봐야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직 나는 그 모순을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는 있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다. 속지 말아야 한다. 291p.



슬픈 일몰을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비밀 반쪽을 나에게 나누어 주던 아버지는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확인했다. 아마도, 우리는 영영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헤어질 것이다. 왜 사랑하는 우리를 멀리하고 떠돌아야만 했는지 묻지도 못한 채 나는 아버지와 헤어질 것이었다. 어쩌면 바로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물려주고 싶었던 중요한 인생의 비밀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293p.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296p.



우리들 모두, 인간이란 이름의 일란성쌍생아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각. 생김새와 성격은 다르지만, 한 번만 뒤집으면, 얼마든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우리.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 있다. 303p. 작가노트 : 양귀자







※ 주의 - 독서 후기에 책 내용 스포가 있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



밤늦게 읽기 시작했다. 잘 시간이 지났는데 다음이 궁금해서 잠을 자기가 아쉬울 정도였다. 작가님이 천천히 읽어달라 당부했는데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책장이 얼마 안 남았다. 드라마 엔딩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초조해졌다. 도대체, 왜 한 권이지?! 시즌제 드라마처럼 모순 2, 모순 3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모순을 읽고 한동안 체해 있었다. 음식이 위에 오래 머물러 체기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라도 머릿속에 서성이는 글들을 써놓지 않으면 소화가 안 돼서 다른 걸 쓰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 것이다.



스물다섯 살 안진진의 고민을 나는 마흔이 넘어서나 하고 있다. 내 인생이 이렇게나 빈약했음을. 둘레나 깊이가 없음을 마흔이 넘어 블로그에 일기를 쓰면서 깨닫는다.



소설의 주인공은 스물다섯 살 안진진. 남동생 대신 등짝을 내어주던, 어려서부터 큰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K 장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억척스러운 어머니와 무능한 아버지. 어머니와 꼭 닮았지만 전혀 다른, 어머니였으면 좋겠는 쌍둥이 이모. 물 흐르듯이 사는 수채화 같은 남자 김장우와 철저하게 계획된 삶을 사는 남자 나영규. 응답하라! 안진진의 남편은 누가 될 것인가도 흥미진진했다.





내 이름은 안진진. 처음 부모가 합의하기는 '진'이라는 외자 이름이었는데, 아버지의 마음이 변해서 참 진(眞) 자 같은 것은 한 번 쓰면 무거우니 두 번으로 하기로 동사무소 직원에게 말해 안진진이 되었다.



나이는 스물다섯. 가족은 어머니와 남동생. 추가로 떠돌아다니며 가끔씩 집에 들어오는, 지금은 그나마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아버지를 넣을 수도 있다.



오십여 년 전 만우절 4월 1일. 거짓말처럼 딸 쌍둥이가 생긴 외할아버지는 이십오 년 뒤 4월 1일, 딸 쌍둥이를 한날한시에 혼인시켰다. 딸 쌍둥이 중 10분 먼저 태어난 언니가 나의 어머니다.



중매를 서는 김포 아줌마가 처음 가져온 사진은 훗날 내 아버지가 되었고, 사흘쯤 뒤 다시 가져온 또 한 장의 사진은 이모부가 되었다.



태어난 날도, 얼굴도, 결혼한 날도 같았던 쌍둥이는 결혼을 하면서 공교롭게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어머니는 평생이 바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돈도 벌어야 하고, 무능한 남편과 싸움도 해야 하고, 말 안 듣고 내빼는 자식들 찾아다니며 두들겨 패기도 해야 했다. 아버지는 술꾼이고 건달이었으며 폭력을 휘두르고 성격파탄자에 걸핏하면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나는 가출을 세 번이나 했고, 남동생은 조폭 우두머리를 꿈꾸며 산다.



이모는 어려서나 자라서도 평탄했는데 결혼 후에는 더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고는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산다. 이모부는 유능한 건축가. 주리와 주혁이는 해외 유학 가서 공부하고 박사과정을 밟는 엘리트다.






작가님은 한날한시에 태어나고 결혼도 같은 날 한 쌍둥이를 불행과 행복의 이면처럼 극명하게 그린다.



남들이 보기에도 불행한 쌍둥이 언니의 빈곤한 삶은 남편복도 자식복도 없다. 무능한 남편이 들락날락 무책임한 삶을 사는 동안 자식을 키우느라 억척스럽게 살아간다. 남편을 미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해답을 찾기 위해 책을 사서 읽는다. 책이 상황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어쩌면 불행을 피하려 애쓰며 세상에 숨겨진 진실들을 배우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누가 보기에도 행복하고 걱정하나 없을 것 같은 다 가진 쌍둥이 동생의 풍요로운 삶. 남편도 자식들도 정시에 출발했다 정시에 도착하는 기차처럼 계획적인 삶을 살며 평탄하게 지낸다.



쌍둥이 어머니와 이모. 아버지와 이모부. 자식들인 안진진과 안진모, 주리와 주혁은 작가님이 모순된 삶을 보여주려 철저히 계산한 캐릭터라 짐작해 본다. 또, 여기에 주인공 안진진이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수채화 같은 남자 김장우와 계획된 삶을 사는 나영규 사이에서 안진진은 고민한다. 마치 '응답하라' 드라마 남편 찾기처럼 끝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설명한다면 그냥 되는대로 즉흥적으로 사는 김장우는 P에 가깝고, 뭐든지 철저한 계획을 세우는 나영규는 J에 가깝다. 주인공 안진진은 김장우에게 끌리면서도 본인의 가정사나 치부를 다 얘기하지 못하지만, 나영규에게는 잘 보일 필요가 없어서였을까 스스럼없이 이야기한다. 어차피 남편은 김장우 쪽으로 기우는 것처럼 그렸지만 마지막에는 나영규를 선택하며 끝이 난다. 아마도 김장우에서 아버지 모습이 읽혔으리라.



이모는 나영규와 비슷한 이모부와 살면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불행했다며 죽음을 선택한다. 안진진은 이모를 좋아했다. 그런 이모가 불행했다면 이모부와 다른 김장우를 선택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직접 살아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라며 아버지를 닮은 김장우가 아닌 이모부와 비슷한 나영규를 선택한다. 사랑의 스튜디오에서 출연자들이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화살표를 누르는 게 아니라 어긋날지도 모르기에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을 택한다고 하는 것처럼.



가슴으로 사랑한 사람 아버지와 김장우는 안진진에게는 소중하지만 불행에 가깝다. 안진진은 안정된 삶에 목말랐을 것이다. 어차피 남편은 김장우인 것처럼 이야기가 흘러갈 때 나는 안진진이 제발 나영규를 선택하길 바랐다. 내 유년 시절의 가난과 결핍의 불안이 계획적이고 안정적인 나영규에게 화살표를 누르게 했다. 안진진은 나영규를 선택하는 것이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모순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혹여 김장우를 선택했더라도.



양귀자 작가님의 떡밥 회수 덕분에 아주 명쾌하다. 뿌려놓은 복선과 암시들을 잊지 않고 탁탁 짚어주신다. 아버지의 손 크기가 그랬고, 사랑의 스튜디오 최선책이 아닌 차선책이 그랬고, 헤어진 다음날의 시디가 그랬고, 이모의 첫눈 오는 날이 그랬고, 어머니의 독서 제목이 그랬다.



작가님은 소설에 유포된 어떤 독후감에도 침범당하지 않은 순수한 첫 독자의 첫 독후감들을 많이 만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긴 독후감을 남기면 안 되는데 생각나는 대로 쓰다 보니 글이 길어졌다. 작가님은 한 번만 뒤집으면, 얼마든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우리라고 말한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고도 한다. 세상의 일들이 모순 투성이라는 게 위로가 된다.



만족하지 못하는 삶 뒷면에도 풍요가 숨어있다니. 소설을 읽으며 인생을 배운다. 덕분에 마음의 둘레가 넓어지고 깊게 들여다보려는 힘이 생긴다.





"인생은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이독경, 사람들은 모두 소의 귀를 가졌다." 296p. 양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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