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12.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설 나약함을 가질 용기를 가져도 괜찮아
봄이가 대학교 입학으로 독립생활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이번 주부터는 숙소를 퇴실하고 집에서 통학하기로 했다.
일주일 전이었다. 주말에 봄이를 만나러 갔는데 내가 아는 봄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낯설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묻자 고시 룸에 대한 편견으로 자신이 사는 환경을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자, 감정을 숨기게 되고, 안으로는 깊게 곪고 있었고, 밖으로 꺼내지 못하자, 그것이 부풀어졌으며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본인은 달라진 게 없다고 했지만, 엄마의 눈에 보이는 아이는 확연히 달랐다.
좁고 답답한 건 참을 수 있지만 고시 룸에 산다는 프레임이 씌워져 다른 시선으로 볼까 봐 두려운 게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고, 지금 당장 숙소로 옮길 마땅한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후 불편한 마음을 덮어두니 짜증이 났고, 실체 없는 원망이 생기고,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살면서 바꿀 수 없는 일에 힘 빼기보다,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걸 나도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나는 되는대로 빨리 방을 빼서 집으로 가자고 했다. 여기 더 있다가는 진짜 봄이를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일주일 뒤 봄이와 나는 고시 룸에 있는 짐을 쌌다. 챙겨간 여행 가방과 커다란 부직포 가방에 이불과 옷가지들, 옷걸이, 잡동사니 등을 쓸어 담았다. 이 좁디좁은 곳에 살림살이가 이렇게나 많았다니. 여러 방문들이 보이는 좁은 복도에 짐들을 하나씩 내어놓고 남은 짐이 없는지 둘러보았다. 여기에 봄이를 혼자 두고 왔던 날이 떠오르면서 내 마음도 불편해졌다. 아이를 방치한 것 같은 죄책감과 미안함 감정들이 뭉텅이로 나를 마구 때렸다.
짐 보따리를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하며 차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름, 가을, 겨울이가 마중 나와 봄이의 짐을 하나씩 들어주었다. 집은 금방 왁자지껄해졌다. 반가움에 이 말도 저 말도 아닌 말들이 오고 갔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아빠하고 나하고>란 영상을 보았다. 딸이 이혼을 결정한 후 그 일로 아버지께 실망을 안겨드릴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오히려 딸을 걱정하며 '네가 행복한 게 제일 중요하다'라며 딸이 행복하다면 그걸로 되었다고 말씀하셨다고. 딸이 어떨지를 먼저 생각하는 아버지라니. 여기서 울컥했다. 딸은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고 살겠다고 하면서 그간의 감정들을 토로했다.
봄이가 집으로 돌아오자 나도 그런 마음이 들었다. 끝까지 해내지 못해도 괜찮다. 결정한 일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결정은 바꿀 수도 있는 것. 네 마음이 편하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돌아온 게 행복하다면 그걸로 되었다.
은유 작가의 <해방의 밤>이란 책에서 읽은 문장도 생각났다.
'그럼에도 불행은 말하는 게 좋다. 내 불행을 나부터 숨기고 부정한다면 상황을 남에게 이해받기도 바꾸어내기도 어렵다.
또 불행을 털어놓아도 되는 안전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행을 말해도 좋을 관계, 일단 밥이나 먹자고 할 수 있는 관계이다.'
책 속 글귀처럼 봄이에게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설 나약함을 가질 용기에 대해 말해주었다.
봄이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동생들과 티격태격 장난을 치고, 크게 웃고, 재잘대고. 자신을 숨기는 일은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든다. 있는 그대로 내보이며 사는 일이 쉬울 것 같지만 생각보다 어렵다. 자기중심이 있어야 하고, 그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지 마음만 달리 먹으면 된다는 걸 잊지 말자.
2024.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