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철학할 수 있어 좋은 나날들
어릴 적부터 철학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니까, 약간 세상과 동떨어진 공상이나 생각에 몰두하는 것을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좋아하고 즐겨 왔다. 그때는 그게 명확하게 '철학하기'로 정의되지 않았을 뿐, 나는 어렴풋이 철학을 해 나가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왜 태어났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세상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사회 시스템은 과연 인간들에게 적합한지 아닌지 등 나와 내 주변을 둘러싼 세계, 즉 '세계-나-존재'라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에 대해 일찍이 탐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지독하게도 어려운 개념이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다가 한 번쯤은 겪게 되는 그런 불편과 불안, 걱정에 대한 철학인 셈이다. 철학자들과 일반 사람들의 차이라고 한다면, 그런 불편의 순간들을 아무렇지 않게 잊거나 지독하게 파고들거나 하는 지점 정도일 것이다. 나는 명확하게 후자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끝을 보지 않으면 그치지 못하는 지독한 성미를 타고나기도 했으니, 태생부터 철학자의 기질을 타고났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나의 고등학교 1학년 장래희망에는 '철학자'라는 단어가 박혀 있다. 실제로 학급에 있던 아이 중 하나가 나의 장래희망을 힐끔거리고는 코웃음을 터뜨렸던 기억까지도 내 뇌리에는 강렬하게 남아 있다(유난히 체구에 비해 머리 크기가 컸던 그 아이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삶을 지독하게 탐구하면서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세계 속에서의 나에 대해 매달리게 될 것을 일찍이 예상하고 적어 내려 간 장래희망이었고, 어느 정도는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철학자로서의 삶이 나에게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와 같은 나의 성격과 특질은 성인이 되어 자유를 만끽하게 되면서 비로소 꽃 피울 수 있었지만, 그 이전까지, 그러니까 지독하게 시스템과 울타리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 나의 청소년기를 더없이 불행하게 만들었다. 당시 내가 속했던 모든 시공간으로부터 언제나 뛰쳐나가고 싶었고, 공상의 나래를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제한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 견딜 정도로 치욕스럽기도 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돌이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시기가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2, 3년을 더 갇혀 지내야 했다면, 나는 쇼생크 탈출을 기획하는 심정으로 무슨 일이든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그 높다란 울타리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던 직후에는 더욱더 높다란 사회의 벽에 가로막혀 제대로 철학에 빠져들 여유조차 없었다. 인생은 언제나 그런 모순의 연속이었다.
녹록지 않은 사회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데 중간중간 책을 몇 권인가 탐독하기도 하고, 지나친 외로움이 나를 감쌀 때면 펜을 부여잡고 되는 대로 글을 써 내려가기도 했다. 나의 갈증을 완벽하게 해소해주지는 못했지만, 그런 소소한 시간들이 끝없이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서 지친 나를 잠깐씩 쉬게 해 주었던 자그마한 오아시스의 역할 정도는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순간들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그 중간 어딘가에서 삶을 내려놓은 채 축 늘어진 몸으로 끝없는 방황의 발걸음을 하염없이 걸어 나갔을지도 모른다. 스물다섯이 된 무렵, 뒤늦게 들어간 대학에서 니체를 만나고서 나는 다시금 철학에 새로이 눈을 뜨는 경험을 하게 되었고, 서른에 가까웠을 때에는 중앙경찰학교에 머물면서 마음껏 여러 책들을 먹어치우기도 했다. 언제나 철학은 나에게 삶의 목적이자 이유, 그리고 분명한 결과였다. 사람들은 철학이라는 단어를 더없이 오래되어 먼지 덮인 구식 학문이라고 생각하거나, 별 것 아닌 일로 지나치게 인상을 구긴 채 심각한 척하는 사람들이 읊조리는 지나치게 어려운 이야기들로 치부하곤 한다. 철학은 삶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두(심지어 나름의 사고를 할 수 있는 동물이라 해도 마찬가지다)가 저마다의 철학으로 삶을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삶 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 또한 철학이다. 누군가는 우정을, 누군가는 사랑을, 또 다른 누군가는 피곤한 직장인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그 또한 하나의 철학일 수 있다. 어떠한 삶의 형태이든 자신의 삶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그리고 존재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인식한 방식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철학으로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극단에 치우쳐 자신이나 주변의 사람들, 혹은 세계를 파괴시켜 버리는 수준에 이른 것이 아니라면 어떤 행위나 생각이든 깊이 있게 성찰할 가치가 충분한 세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네 삶은, 저마다 찬란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살 만한 것이겠지.
백수와 실존, 이 두 단어의 관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모순이기에, 지금의 나는 더없이 철학하기 좋은 시기라고 스스로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백수, 뚜렷한 직장이 없어 사회에 보탬이 되지 못하고 있는 존재다. 실존, 뚜렷하게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이 위치한 지점이 어디인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나타내는, 혹은 생각하게 하는 지표다. 그런 지점에서 백수의 실존이라 함은, 그 가치를 논하기가 상당히 애매하다(기실,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순됨과 동시에 기초부터 쌓아나간다는 차원에서 무(無)로부터 많은 것들을 상상하고 창조해 낼 수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런 시기에 내가 독서 모임을 만들었고 그 모임의 장을 맡고 있다는 사실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게 된다. 어쩌면, 그 모임을 통해 나의 실존을 어떻게든 만들어가고 싶었던 나의 자아가 모든 일들을 계획하고 실천에 옮기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작년 겨울, 독서 모임을 만들고 진행하는 가운데 본격적인 철학적 탐구가 이루어져 왔다. 모임 창립 멤버였던 친한 형의 제안으로 카뮈의 작품 세계관을 따라 독서를 해 나간 것을 시작으로, 여러 유명 문학 작품들, 그리고 실존주의적 체험기, 러셀의 서양 철학사를 거쳐 본격적으로 후설과 하이데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메를로퐁티로 이어지는 현대 실존주의에 대한 탐구에 이르렀다. 나는 그 여정 속에서 더 없는 황홀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이전부터 미약하나마 나름대로 하나의 신념이 되어주었던 철학이, 이제는 앞으로의 내 삶의 목표와 이유로 완벽하게 굳어질 수 있었던 과정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 글을 쓰지 않는, 철학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기가 힘들어졌다. 나라는 존재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꾸준히 읽고 쓰고 철학하며 살아갈 것이란 사실이 그 어떤 진리보다 자명하게 다가온다. 이번 생은 끝없는 철학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내 숨이 붙어 있는 한은.
올해 읽었던, 그리고 해 나갔던 철학 가운데 가장 감명 깊었던 이를 꼽으라고 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카뮈를 외칠 것이다. 지인의 추천을 받아 읽게 된, 그리고 공부하게 된 카뮈였지만, 놀랍게도 내가 이전에 한 차례 반한 적이 있었던 니체의 사상을 모티프로 삼은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의 사상과 철학은 과거의 니체보다 한층 더 완성도 높은 체계를 가지고 있어 나를 매료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마땅히 그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게 되었으며, 아직까지 그 이상의 산을 만나지 못해 여전히 카뮈라는 종교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그가 말한 세계와 나 사이의 부조리, 그 부조리를 이해하고 마땅히 반항하라는 그의 메시지는 참으로 탁월하고, 또한 논리적 결함도 없어 보인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황폐화된 인간 사회에서 모두가 극단으로 치우쳐 목청을 높이고 있을 때, 카뮈는 고고하게 균형과 한계에 대한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풀어나갔던 사람이다. 특정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이 좋다거나 옳다 해도 그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서 균형을 위한 반항을 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일이라는 그의 말은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삶과 세상은 언제나 어렵지만, 이런 천재적인 철학자들의 의견과 생각을 나의 의견과 버무려 헤아리다 보면 그나마 나아가야 할 길이 어느 정도 보이기도 한다. 누군가 진지한 얼굴로 철학의 쓸모에 대해 묻는다면(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라고 스스로는 생각하지만), 바로 그런 데에 있다는 식의 논리로 읊조릴 수도 있겠지. 물론, 나에게는 철학이 삶 그 자체이지만 말이다.
2026년을 맞이한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 보면, 올해는 작년에 비해 어느 정도 철학에 할애하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해는 잠시 쉬었던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세상과 맞서 싸워 나가야 하는 해이니 말이다. 또 한 번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며 쌓아나간 경험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철학에 매료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 없었던 나만의 철학을 만들어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좋다. 세상의 풍파에 과감히 몸을 던지고 나아가면서 가끔씩 지금의 백수 시기, 그러니까 마음껏 철학할 수 있었던 이 시기를 추억하며 나름의 향수에 젖게 될 그날에도 여전히 철학을 하고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지금의 나와, 그리고 내일의 나는 마땅히 노력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 어느 날에도, 지금처럼 모임을 유지해 나갈 수 있기를 마찬가지로 바라고, 또 노력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