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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원 Sep 19. 2024

0화. 프롤로그

집으로


‘어쩌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지극히도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 너무 우리에게 가혹한 현실이 떨어졌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엄연히 말하자면 정말 누군가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이니까.’


덜컹거리는 열차에 몸을 맡긴 채로 나는 처음 순천역에 도착했다. 안내 방송이 끝나자 열차가 멈춰 섰고 남들이 모두 짐을 챙길 때 나는 빈손으로 가볍게 플렛폼에 내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오랜만에 온 자식을 반기는 할머니, 자신의 오랜 동반자인 여자의 손을 잡아주는 늙은 남자도 보였다.

순천을 살면서 처음 오지는 않았다. 분명히 매년 몇 번이고 왔건만 어째서인지 낯설었다. 아마 순천역 자체는 처음이라 그런 걸지도 모른다. 플렛폼을 쭉 따라 걸어 오르면 어느새 광장이 나온다. 역 안은 볼일이 없으니 발걸음을 재촉했다.

6차선 도로를 건너 조금 걷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시장이 나온다. 시장에도 볼 것들이 많겠지만 나는 조금 더 걸어 이제는 다른 사람의 자리가 된 파라솔 밑에 섰다. 할머니는 꼬막이 싸다며 내게 Kg당 가격을 알려주셨다. 한참을 멍하게 서 있다가 자전거의 종소리로 정신을 차렸고 그 할머니에게서 꼬막 한 봉지를 샀다.

내가 산 꼬막은 아마 그 할머니의 귀여운 손주들의 용돈으로 쓰이겠지. 나의 할머니가 그렇게 우리를 위해 살아가셨 듯 아마 저 할머니도 그 자리에서 같은 마음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나의 추측이고 나의 바람일지 모른다.

바로 골목에 들어가면 익숙한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여전히 양쪽에 차를 세워두는 건 변함이 없었다. 아마 부모님이랑 함께 왔더라면 세워진 트럭과 봉고차의 자리 중 하나에 아빠도 세워두셨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길을 따라 걷다가 왼쪽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이라기보다는 두 집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이 통로에 발걸음이 울리는 게 신기했지만 이제는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되었다. 아마 할아버지께 이 원리를 설명해드렸다면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골목 끝, 나는 익숙한 스텐으로 만든 문 앞에 섰다. 하지만 차마 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대문 옆에 붙어 있던 ‘강용진’, ‘이화선’이라는 두 개의 문패는 떼어지고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집엔 이제 다른 누군가가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애기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문 앞에서 쩔쩔매고 있을 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무줄 튕기는 듯한 발소리에 옆을 보니 이웃집 어르신이셨다. 어르신께서는 눈을 가늘게 띄며 나를 보시더니 이내 누군지 알아차리신 모양이다.

   

“강 씨 막내 손자 아니냐.”    

 

나는 엷은 미소와 함께 “네.”라는 짧은 대답을 했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냐.”

“그냥, 잠깐 들릴 곳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여기도 와봤어요.”

“인자는 남의 집이라 마음대로 들어가지도 못할 건데.”

“네, 그렇게 된 것 같더라고요. 여기 있어야 할 문패도 없어졌고.”

“문패는 걱정하지 말어. 우성이 그놈이 몇 달 전에 조심히 떼어 갔으니께.”     


아무래도 문패는 큰삼촌이 잘 정리하신 모양이다. 혹여 누가 떼서 버리거나 그랬을까 걱정했는데 한시름 덜었다.     


“어째 많은 시간을 보낸 집이었을 텐데 아쉽겠구만?”

“어쩔 수 없죠. 어른들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좋은 곳 갔을 거야. 자식들이 얼마나 잘 챙겨줬는데.”     


나는 어르신의 말을 듣고 가슴 한 켠이 아파왔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한 적은 없다. 적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께는 둘도 없는 좋은 손자였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 역시 책임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앞에 서 계시는 어르신이 조금씩 떨려 보였다. 아무래도 나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맺힌 것 같았다. 몸을 잠시 돌려 눈물을 닦은 뒤에 어르신께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요즘 별일 없으시죠?”

“별일 없지. 없다만 요즘 무릎이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아. 걱정 해줘서 고맙네.”

“이 정도야,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인 걸요.”     


어르신은 그렇게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멍하니 문앞에 섰다. 오른쪽에 보이는 초인종을 누르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께서는 문을 열어주셨다. 어쩌면 지금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자 책을 손에 쥔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을까.

나는 초인종에 손을 가져다 댔고 눈을 꼭 감고 초인종을 눌렀다. 오래된 만큼 고장났을 수도 있어 내심 고장나기를 바랐다. 만약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온다면 어떻게 둘러댈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이잉-     


그러나 바람과는 다르게 또 다른 바람대로 문이 열렸다. 살짝 열려 버려진 문틈으로 본 집의 마당은 내가 아는 곳과는 사뭇 달랐다. 회색 콘크리트로 칠한 바닥은 어디 간 채로 초록색 페인트로 꼼꼼하게 발라져 있는 바닥이 보였다. 겨우 마당의 차이만으로도 말문이 막힌 내게 집주인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그 물음에 문을 열고 들어가 집주인 아저씨와 마주쳤다. 대충 6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낯선 아저씨가 고개만 내밀고 할아버지의 자리에 앉아 계셨다. 누구냐는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해야 했지만 너무 많은 생각의 소용돌이가 강하게 머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하나 하나 다 설명하기 힘든 그런 생각의 연속이었다.

그 순간 별채에서 나오는 아주머니께서 나를 알아봐 주셨다. 내가 해야 할 대답을 아주머니께서 대신 해주셨다.     


“어르신 막내 손자 아니세요?”     


이 물음에 집주인 아저씨도 흥미가 생기셨는지 밖으로 나와 마당에 섰다. 어색한 대면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머니께서는 말을 이어 가셨다.     


“고생 많이 했죠? 저도 처음에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란지 몰라요.”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나는 더욱 온몸이 떨려왔다. 놀라지 않았다. 사람에게는 언제나 찾아오는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완벽할 결말이자 마침표. 하지만 그 사이에 껴있던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은 이미 곪아 고름이 되어 터져버린 후였다.

집주인 아저씨는 안에 들어가서 일단 얘기를 하자며 나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하루, 이틀 와본 곳도 아니고 십몇 년을 오간 집임에도 어색했다. 당연히 집에 사는 사람이 달라진 만큼 변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내 눈에는 아직 신발장에 걸터앉아 가을 전어를 구워 먹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설에는 장어와 고기를 함께 구워 먹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현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족의 모습을 한 바람이 천천히 지나칠 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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