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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riter Jul 20. 2023

1. 내가 티칭을 하는 까닭


나는 항상 책을 좋아했다. 마음같이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항상 책을 가지고 다녔고, 어릴 때는 버스보다 지하철을 탄 이유는 책을 봐도 멀미를 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나에게 대학 진학 후 영문학을 전공한다는 사실은 꾀 근사한 일이었다. 다른 과 친구들은 중간고사며, 기말고사가 다가오면 어려운 전공 서적에 얼굴을 파묻고 형형색색의 펜으로 밑줄도 치고, 동그라미도 치고, 별표도 해 놨을 필기를 옆에 두고 너무나도 많은 지식을 암기하고 문제를 푸는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면 내가 영문과 학생인 게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나는 수업시간에 읽었던 소설을 천천히 다시 읽고,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빼곡히 받아 적어서 시의 원문보다는 나의 깨알 같은 글씨가 더 많은 문학서를 다시 한번 음미하는 정도의 공부를 했다. 학기말에는 리포트를 써야 했는데, 그것도 보통은 수업시간에 읽은 작품 중에 하나를 내가 선택해서 분석을 하는 것이라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평생 책을 읽을 수 있는 직업을 구하면 좋겠다는 상상을 막연히 했다.


그렇게 4학년 2학기에 저작권 에이전시에서 인턴십을 하게 되었고. 그 일을 하면서 깨달았다. 나는 아무 책이나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빠르게 일을 위해서 읽는 책은 더욱이나 거부감이 생겼다. 그래서 일단은 몇몇의 교수님들의 제안에 따라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석사과정은 2년, 길어야 3년이라니, 크게 잃을 것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진학한 대학원에서는 교수님들과 더 많은 교류를 하고 수업시간에는 더 많은 책과 이론서를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사실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를 못 한 텍스트가 태반이지만, 소정의 대학원생들과의 교수님의 대화는 매주 특별하게 느껴졌다. (특히 첫 학기에는… 갈수록 발표에 대한 부담감이 커져서 스트레스받기 시작한 건 석사 2학기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게 수면부족에 시달리면서도 교수님들의 직업이 새삼 좋아 보였다. (어리다면 어리고, 똑똑하다면 똑똑한)

대학생, 그리고 대학원생들과 이렇게 매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라면 감히 욕심 내보고 싶었다.


그래서 1학기가 채 끝나기 전에 나는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고 싶어서 유학길을 택했다. 한국에서 박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한국에서 학위를 받으면 최선의 경우, 대학에서 대학영어를 가르칠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학원에서 공부하며 만난 선생님들은 매우 존경했지만 사교육 시장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것은 문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닌 문법이나 독해, 어휘를 가르치는 것이어서 마음이 가지 않았다. 영어 문법에 진저리가 났고, 더 이상은 제멋대로인 것만 같이 느껴지는 영문법과 단어 발음에 집착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문학을 공부하고 문학에 대한 글을 쓰고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학밖에는 길이 없다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그래서 막상 미국에 와서 보니 나는 학과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는 대가로 나에게 티칭을 요구했다. 그런데 과외와 학부시절 친한 교수님의 조교로 학생 에세이 채점을 도와드린 것 밖에는 티칭 경험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개강 전에 1주일간 오티를 하면서 기나긴 5년이란 박사과정을 준비시키면서 학과는 티칭에 대한 기본적인 오티를 병행해 주었다. 그 일주일 간 학급 경영(classroom management), 학생 과제에 효과적인 코멘트 남기는 법, 공평하게 채점하는 법 등 티칭에 있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들을 짚고 넘어갔다. 


학과에 외국인 대학원생이 많아서 학과는 티칭경험이 없는 미국인 학생과 외국인 학생은 첫 두 학기 동안 교수님의 조교로 그레이딩을 하면서 대학에서의 강의실 분위기를 익히게 했다. 그때 한국에서 알던 친구가 그 학과에 박사 선배로 있었는데, 그 친구/선배가 해준 말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다. “우리 학과는 전국 순위에서 많이 밀리긴 해도 학생들이 졸업하기 전에 티칭 훈련을 잘 시켜서 내보내. 그래야 우리도 임용시장에서 경쟁력이 생기거든.” 학과의 순위가 밀리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이 학교의 영문과는 인문대치고는 빵빵한 펀딩과 티칭에 있어 다양한 멘토링을 제공하며 동시에 전공과목도 가르쳐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1년 차에는 온라인으로 분반이 십 수개 열리는 비즈니스 글쓰기 수업에 그레이더로 티칭이라는 일을 시작했다. 그 첫 학기에는 한국에서 수업 조교를 할 때와 같은 마음으로 임했다. 모든 결정과 권한은 교수님께. 그렇지만 첫 과제가 들어왔을 때는 그래도 나에게 채점할 권한이 주어졌는데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서 피드백을 잘 주고 꼼꼼히 채점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2주를 미루다가 담당 교수님께 지적을 받았다. 제출한 지 2주가 넘으면 피드백을 줬을 때 학생들이 읽어도 잘 와닿지 않을 수 있고 다음 과제를 할 때까지 충분히 숙지할 시간이 없을 수 있다는 한 마디. 이 지적에 나는 학과에서 조교를 대하는 태도에 놀랐다. 한국에서 조교의 역할은 그저 교수님의 지시 사항에 따라 작은 임무를 해내는 것이었다면, 여기서의 그레이더는 강사 훈련생 정도의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시에는  그저 그레이더로 일하고 있을 뿐인데, 내년에는 한 수업의 강사로, 25명 남짓의 학생들의 선생님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담당 교수님은 나무라거나 보채기보다는 상황에 대한 설명과 나의 행동이 어떻게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 방식으로 가르침을 주었다. 


물론 그 지적의 지혜에 대해서는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당시에는 마트에서 나초칩과 과카몰리를 잔뜩 사 와서 밀린 나의 과제를 뒤로 제쳐두고 그레이딩을 시작했다. 한 과제에 15분 이상 할애하지 말라던 교수님과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빨리빨리 해치우려 했으나… 그건 노련한 선생님들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초짜인 나는 감히 15분 안에 학생의 과제를 채점하지 못했다. 그때는 그게 그래서 더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15-20분 안에 그레이딩이 끝나야 할 과제들을 30-40분, 지쳐있을 때는 1시간까지도 붙들고 채점을 하다 보니 25개의 과제를 채점하는 것은 거의 15-17시간에 가까운 정신적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 해의 티칭은 머리를 싸매고 꾸역꾸역 그레이딩을 하는 일과 동일시 되는 일이 되어버렸다.


2년 차에는 부푼 기대감으로 학교에 돌아왔다. 이번에는 나도 1학년 글쓰기 수업을 맡아서 독단적으로 강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전 해에 참여했던 오티도 다시 참석하여, 이번에는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만나서 강의도 하고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의 역할에 대해 배웠다.


그렇게 고대하던 개강 첫날이 다가왔고, 8시 수업이라 7시부터 연구실에서 강의 계획안을 다시 보고, 학생들에게 수업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자기소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고민하며 기다렸다. 배정받은 강의실이 공학관에 있어서 일찌감치 출발했다. 나의 첫 학생들을 만나는 게 설레었지만 사실은 너무 긴장되고 떨려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다. 선배들에게 워낙 호러스토리를 많이 들은 탓이기도 했다. 백인 학생(보통은 남학생들, 그러나 간혹은 여학생들도)들이 선생님(특히 유색인종의 선생님, 특히 여자 유색인종 선생님, 그리고 외국인 선생님)의 권위에 도전을 한다든가, 체육 특기자(student-athlete) 학생들이 수업에 나오지 않는다거나, 성적에 대해 이의제기를 해서 삶을 피곤하게 한다는 다양한 이야기를 1년째 들어와서 나는 어떤 진상 학생들을 만나게 될지, 그리고 나는 그 순간에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를 할 수 있을는지, 그리고 그런 순간에 대처를 잘 못해서 반 전체가 나를 우습게 보진 않을지, 그래서 classroom management가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닌지, 오만가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했다.


하지만 긴장한 모습은 잠시 접어 뒷주머니에 넣어두고 최대한 자신 있게 강의실에 들어선 순간 나는 이미 느꼈다. 아침 8시지만 말똥말똥한 눈으로 각자 어색하게 앉아있는 신입생들과 나의 관계는 내가 앞으로 잊지 못할 관계가 되리라는 것을. 그렇게 풋내 나는 나의 첫 강의는 무사히 끝났고 티칭의 첫 학기가 시작되었다. 권위를 도전할 것 같아 보이는 백인 학생들도 있었지만 얌전하고 순한 백인 학생들도 있었다. 수업에 정말 안 오는 student-athlete도 있었지만 알고 보니 집에 동생들을 봐야 하는 딱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내가 정해준 성적에 항의하는 학생이 그 학기에는 없었지만, 앞으로 간간히 보게 될 거란 건 예감할 수 있었다. 선생님으로서의 경험이 쌓이고 강의실에서의 페르소나가 생기면서 나는 한 주 한 주, 한 학기 한 학기 조금씩 성장해 나아갔다. 


물론 힘든 학기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나는 학기가 지난가을 학기의 포스트콜리니얼 문학 수업이다. 포스트콜로니얼 문학이란 식민지에 대한 비판을 하는 에세이, 이론, 소설, 그리고 시를 일컫는다. 내가 좋아하는 프란츠 파농과 에이메 세자르 등의 흑인 작가들의 글로 수업을 시작했고, 다양한 시각에서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작품들을 읽었다. 그렇게 백인 우월주의며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매 수업의 주를 이루었고, 미국 남부에 위치한 학교이다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런 방향의 이야기는 불편한 걸 넘어서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재미있었으나, 학생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반응도 없고, 질문을 해도 내 눈만 피하고 급급했고, 시험에 대한 반발도 너무 심했다. 분명 그전 해에 가르친 내용과 거의 동일했고, 과제도 줄이고 시험시간도 늘려줬는데, 내가 예상한 감사함의 반응과는 천지차이나는 그 반의 분위기에 학기 도중에 시험 형식을 바꾸는 등의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중간고사를 치른 후에는 살짝 포기한 마음으로 나는 내가 할 일을 하러 간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밝은 척 강의를 했고, 학생들의 참여를 기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강의를 많이 하는 방법을 택했다. 난감했지만 티칭을 하면 그럴 때가 있다. 이유 없이 학생들이 나랑 잘 맞는 학기가 있다면 이유 없이 나랑 안 맞는 학기도 있다. 그러나 지난가을처럼 힘든 학기에도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은, 학생들이다. 


그 학기의 어느 저녁, 학교의 Asian American Studies Initiative (AASI; 학교에 Asian American studies를 공식 전공/부전공/프로그램으로의 설립을 요구하기 위해 인식개선 운동을 하고 학교에 공식 요청을 하는 모임)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참여했다. 코로나 시대 반아시아계 인종차별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내가 박사학위를 하는 학교에서는 이러한 모임이 개설되었고 AASI는 학교에 Asian American studies가 필요한 이유를 학생들과 행정 선생님들, 그리고 학교에 알리고 설득하는 일을 했다. 그날은 초청강사와의 토크쇼 유형의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참여자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서 AASI의 멤버인 한 학생이 다가와서 인사를 했다. 자신이 지난가을 내 포스트콜로니얼 문학 수업을 들은 학생인데 그 수업을 듣고 AASI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AASI가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Asian American studies강의를 한 게 아니었다.) 나도 한창 Asian American studies와 같은 ethnic studies(인종학)를 유입하는 것이 대학기관의 탈식민화 과정의 필수 코스라고 믿고 있던 참이어서 그 학생의 AASI 참여가 대견하면서도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수업에 대한 감사인사를 남기고 학생은 다시 친구들에게로 갔다. 나는 그 학생을 알아보지도 못한 것에 미안했고 (비대면 수업이었고 카메라를 켜는 게 필수가 아니었던 탓이리라) 굳이 나에게 고맙다는 말과 내 수업을 통해서 이런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느꼈다는 말이 내가 그 학기의 수업도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의식을 갖게 했다.


나는 생각한다. 한 학기에 만나는 20명, 30명, 50명의 학생들이 모두 단 한 학기 동안 나와 수업을 하면서 내가 매일 준비해 가는 강의 내용을 다 배워가지는 못해도 단 한 명의 학생이 배움에서 무언가를 행동으로 실천해서 딱 그만큼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내 수고는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개중 2-3명은 내 수업시간에 읽은 작품 혹은 수업시간에 나눈 이야기로 인해 시각의 변화가 생겨서 미세하게라도 앞으로의 행동의 변화가 생길 수도 있고. 또, 한 4-5명은 내 수업에서 새로이 읽은 텍스트가 감명 깊었다고 느끼고 친구나 가족에서 그걸 한 번 추천하는 것만으로도 파장은 꽤 크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그래서 나는 티칭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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