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달 Mar 06. 2024

아빠가 못 배운 사람이라서

기역부터 히읗까지 둘: ㅂ | 배움

1.


  그날은 무척 더웠다. 한여름 대구의 하굣길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맘때가 되면 너 나 할 것 없이 교복바지를 무릎까지 걷어붙였고, 어떻게든 시원해지려고 발악하는 사람들을 비웃듯 가로수마다 붙은 매미들의 울음이 대차게 귀를 때렸었다.


아무튼 함께 집에 가던 친구와 덥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을까, 전화가 울리고 액정에 아버지라는 세 글자가 박힌다. 지금이나 10년 전이나 똑같이 조금은 긴장한 채로 "어 아빠. 왜."하고 묻는 내게, "어. 밥은 먹었나."하고 당신은 답했다. 여기까지는 늘 하던ㅡ글을 쓰는 오늘까지도 여전한ㅡ그렇고 그런 대화였다.


그런데 그날은 평소답지 않게 "지금 일하다가 포크레인이 섰는데"하며 뜸을 좀 들이더니, 알파벳을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씨. 오. 엠. 엠. 쩜. 에러. 이게 뭐 같노." 나는 평소의 아버지 답지 않은 다소 생경한 대화주제에 잠깐 당황했다가, 이윽고 당신이 꾹꾹 눌러서 말한 철자를 열심히 더듬어 Communication이다, 아니다 Command다 하며 옆의 친구와 답을 찾아본다. 그러자 우리의 대화를 어렴풋이 듣던 당신은, "컴퓨터 아니가?"하고 다시금 묻는다.


아니. 컴퓨터는 엠이 하난데. 하던 생각이 입 밖으로 출력되기 전에 급하게 멈춰 선다. 그리고는 최대한 말을 늘이다가, "어. 비슷한 것 같다. 뭐 통신 오류 그런 거 같은데. 어디 선 끊어진 거 아니가."하며 나름대로 의견을 내놓는다. 그러자 당신은 얼마간 말이 없더니 “알겠다. 끊어라. 밥 먹어라.”하고는 스피커 너머로 사라졌다.


그때 마침 함께 오던 친구와도 동네슈퍼 앞 횡단보도에서 헤어졌다. 그렇게 골목 초입의 놀이터에서 집 대문에 닿을 때까지, 고작 열아홉 먹은 아들에게 전화해 멋쩍게 단어를 물어봤을 아버지의 심정을 한 발자국씩 꾹꾹 눌러 밟으며 헤아려봤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버지는 그 후로 비슷한 질문을 하지 않으셨고, 약 10년 간 더 생업을 이어가신 뒤 애증의 굴삭기를 처분하고는 고향으로 귀촌하셨다. 그렇게 아버지가 은퇴하던 그때, 나는 우연한 기회로 얻었지만 눈에 안 띄게 잘 숨겨놓았던 아버지의 포크레인 매뉴얼도 함께 은퇴시켰다.


그날은 무척 더웠다. 다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한여름의 대구라서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한여름 폭염 속에 멈춰 선 그 커다란 건설기계의 반 평도 되지 않을 운전석에서, 몸도 마음도 동시에 달아올랐을 아버지를 떠올린 것도 그날의 더위에 한몫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응팔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2.


  학창 시절 내일까지 가져오라며 선생님이 나눠주던 회색 종이는ㅡ요즘은 갱지가 아닌지 새하얀 종이더라ㅡ참으로 많았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가정환경조사서'와 비슷한 이름의 무엇이었다.


부모님의 직업과 학력, 자가 여부와 가족관계 따위를 적어서 내라던 서류였는데, 94년생 개띠 기준 고등학생 때까지도 꼬박꼬박 적어서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인정보에 퍽 민감해지고 팍팍해진 요즘의 공교육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무튼 초등학교 3학년쯤 됐을까, 무릇 그때쯤이면 각종 가정통신문의 회신란에 적힌 글씨의 주인은 부모님이 아닌 내 또래들로 바뀌기 마련이었고, 나 또한 그랬다. 늘 아버지가 채워주던 종이의 여백을 내 손으로 채워보고자 하는 욕심이 그득했을 그때의 나는, 퇴근하고 돌아온 부모님에게 짠하고 멋지게 보여줄 요량으로 거실 바닥에 종이를 대고 엎드려 연필을 잡았다.


자가는 뭐고 전세는 뭘까. 우리집은 3층 주인집인데. 엄마는 쉽지. 직업은 주부. 언젠가 옛날 오백 원 지폐가 끼워져 있던 안동여고 졸업앨범을 봤다.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 아니다, 대학교는 어디지? 물어봐야지. 할머니는 청송에 계시니까 같이 안 살고, 누나는 두 명. 그렇게 막힘없이 또박또박 써 내려가던 어린 나는 ‘부’라는 글자 아래로 돌아와 한참을 머문다.


아빠 직업은 뭐지? 포크레인 운전? 운전으로 끝나면 직업이 아닌 것 같은데. 운전수? 아빠는 무슨 대학교 나왔지? 고등학교 졸업앨범도 못 봤는데, 하던 중 마침 부모님이 집에 돌아온다. 나는 곧바로 현관으로 뛰어가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하고는 오후 내내 씨름하던 문제를 아빠에게 내민다.


당신은 내가 써둔 종이를 한참 보더니, 나를 앉히고는 직업에는 ‘중기대여업’ 학력에는 ‘중퇴’라고 적으라며 한 글자씩 읊어주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중기대여업을 한자로 따로 적고는 그 뜻까지 풀어주는 것까지 잊지 않는다. 그 후엔 학교를 끝까지 마치지 못한 이유와 그에 대한 아쉬움, 가난했던 유년기를 더 말해주었는데 기억이 나진 않는다.


물론 머리가 굵어지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기에 내 아버지와 그 형제들의 옛날이야기라면 지금도 읊을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기억이 없다. 다만 그날 들었던 다른 생각은 아직까지 생생한데, 하나는 “와. 중학교만 가도 어려운 거 많이 배우나 보다. 근데 누나들은 왜 안 똑똑하지?”였고, 다른 하나는 “와. 그럼 대학교 나온 사람들은 얼마나 똑똑한데?”였다.


물론 그 치기 어린 생각은 내가 직접 중학생과 대학생이 되어보며 완전히 혁파당했다. 중학생이 된 나는 누나들보다 크게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거니와, 대학생이 되어서는 '똑똑하다'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 자체를 다시 짚어본 탓이다.


아무튼 앞선 이야기들과 이어질 생각들은 이 '배움'이란 단어를 이리저리 뜯어본 내 나름의 평생연구과제다.


제가 생각하는 학과 습이 한 공간에서 공존했던 시기입니다


3.


  배운다는 것을 한자어로 치환하자면 '학습(學習)'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의미를 찾는 과정이 늘 그렇듯 오늘 역시 이것을 한 글자씩 쪼개는 것부터 해보려 합니다.


익힐 습(習)은 반복을 통해 체화되고 숙달되는 행동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애초에 習이라는 글자의 형성원리가 날갯짓(羽)을 거듭 반복하는 새의 모습에서 따온 것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때문인지 용례도 습관 · 실습 · 연습 등 머릿속에 저장되는 명시적인 개념보다는 몸속에 각인되는 내재적인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배울 학(學)은 여러 형태의 배움 중에서도 '깨치다'는 의미에 가깝습니다. 용례로 보자면 인문학이나 공학과 같은 각종 지식의 뒤에 붙는 꼴이 그러하고, 또 그것을 도야했을 때 얻는 학자와 학력 등의 단어와 짝을 맺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애초에 아래에 볼 견(見)이 붙어 그 의미 그대로인 깨달을 각(覺)이 되기도 하지요.


결국 학과 습을 구태여 구분 짓자면 학은 박제된 언어와 글을 중심으로 무언가를 얻는 것, 습은 살아서 날뛰는 비언어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전승되는 무언가 같습니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는 학과 습이라는 단어 중 암묵적으로ㅡ혹은 대놓고ㅡ학을 좀 더 중시하는 듯합니다. 소위 '배운 사람'의 척도를 나누는 가방끈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끈의 길이는 두말할 것도 없으며 그 끈이 만들어진 원산지가 서울인지 아닌지, 혹은 해외인지에 따라 '배운 사람'의 정도를 가늠합니다. 이는 결국 그 가방끈이 연장되어 누군가에게는 넥타이가 되고, 교편이나 가운이 되며, 여타 다른 형태의 사회적인 인정으로 이어지는 등 보다 실질적인 혜택을 누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가방끈의 가치와 그것을 위해 수반되는 노력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그 탄탄하고도 화려한 가방끈을 자랑하는 이들 중 습의 개념은 갖추지는 못한,  '많이 배우기만 한 사람'을 보고 들었던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4.


  많이 배우기만 한 사람은 본인이 쌓은 높은 수준의 학에 비해 습의 정도가 현격하게 낮은 이들입니다. 학과 습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한 그들의 행동은 꽤 사소하면서도 영향은 거대합니다. 작게는 예절부터 크게는 범죄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다만 그 중간값을 찾아 정의하자면 '본인의 일이나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형편없을 때'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한없는 학구열로 멋지게만 보이던 O선배는 밥 먹을 때조차 한없이 쩝쩝거린다든지, 본인 분야에 정통한 석학 O교수는 횡령에도 정통했는지 학교의 장비를 팔아 뒷돈을 챙기다 적발되었다든지, 직장 동료들에게는 한없이 살가운 O차장이 식당 종업원에게는 자연스러운 하대와 폭언을 한다든지와 같은 경우입니다.


물론 상당한 수준의 학을 닦은 이들은 높은 확률로 비슷한 정도의 습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다만 보기 드문 위 사례들의 주인공들은 큰 실망감을 주곤 했는데, 학과 습 사이의 괴리가 클수록ㅡ즉 쌓아놓은 학이 높으면 높을수록ㅡ실망감의 정도는 그에 비례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쯤에서 학창 시절에 한 번씩 들은 "학에서 그치지 말고 습으로 이어져야 진정한 공부"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물론 그 말을 하셨던 당시의 교원들은 "오늘 배운 거 집에 가서 꼭 복습해라"는 뜻의, 습이 학을 강화하는 기제란 의미였겠지만 여러 일들을 겪고 나니 저 말이 또 다르게 들립니다.


학의 높고 낮음과 별개로 습을 동시에 발전시켜야만 진정 잘 배운 사람이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요즘 세상은 예전보다 학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져 그 문턱이 낮아졌지만, 보다 접근성이 높아진 학만을 무작정 쫓다 보니 습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이가 너무 많아진 것 같습니다.



5.


  어릴 적부터 오늘날까지도 제 아버지는 가르쳐줄 게 없어서, 물려줄 것이 없어서, 하며 자주 미안함을 내비치곤 합니다. 아마도 당신께서는 본인의 가방끈이 짧아서,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식에게도 남들만큼의 학을 쌓을 기회를 주지 않은 것 같이 느껴서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의무교육이 사실상 고등학교까지 이어지는 현시점에 학의 영역은 부모가 아닌 자식이 욕심을 내야 하는 부분이며, 그마저도 저는 모자라지 않은 지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기에 절대 아버지를 원망한 적이 없습니다.


외려 저는 아버지가 알려주시고 물려주신 훌륭한 습에 대해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사소하고 달리 보면 본질적인 것들입니다. 작게는 엄하게 배웠던 밥상머리 예절부터 시작할 것이고, 넓게는 타인에 대한 배려나 예의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덕분에 어디 가서 많이 배운 사람이라는 말을 듣진 못하더라도ㅡ물론 이건 제가 학창 시절에 더 노력하지 않은 탓입니다ㅡ, 소위 "가정교육이 잘못됐다"는 소리는 결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언젠가 세상에 나올 수도 있는 제 자녀도 그렇게 키우고 싶곤 합니다.


크게 세 가지 연유에서 그리 생각하는 것이 ① 첫째는 학은 돈을 주고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습은 아니기 때문이고, ② 둘째는 학은 그 시기가 늦어도 얼마든지 갈고닦을 수 있지만 습은 나이를 먹을수록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며, ③ 마지막으로 학을 갖춘 이가 습을 갖추지 못한 사례는 많아도 습을 갖춘 이가 학을 갖추지 못한 사례는 드물고, 또 그렇다 한들 훌륭한 습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컴퓨터의 철자는 정확히 모를지라도 훌륭한 습을 알려주고 물려준 내 아버지가 늘 자랑스럽습니다. 동시에 언젠가 생길지도 모를 제 자녀에게도 그런 아버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운명의 장난인지 저도 마침 영어에는 퍽 소질이 없으니 이미 절반은 성공한 목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끝.


작가의 이전글 장래희망은 없는데요, 삶의 목적은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