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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몬스 Dec 23. 2022

복직 일기 (2)


22. 5. 23.

선풍기를 꺼냈다. 트를 입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청사 밖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시러 나가기 거로운 무더운 날씨다. 창문을 열고 이웃의 생활 소음을 듣는 계절이 되었다. 내일은 어마어마한 장기근무가 예정된 날이라 긴장상태다. 내일이랑 모레만 어떻게 잘 견뎌보자고 마음에 갑옷을 두른다.


22. 5. 25.

커피가 점점 진해진다. 루에 1샷으로 충분했는데 이젠 아침에 2샷 오후에 1샷은 먹어야 깨어있을 수 있다. 회사에서 혹사한 허리에게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누워있는데 머릿속으로 일 생각이 둥둥 떠다닌다. 흘려보내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따지는 물음, 동료의 못마땅한 반응 털어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늘어난다. 선에 바람이 빠지듯 몸에 힘이 빠진다. 힘이 있어야 땅에 발도 제대로 딛고 그래야 허리도 세울 수 있는데 그럴 기운이 나지 않는다. 다녀와서 2시간을 자거나 명상음악을 들으며 머리를 비워내는데도 계속 직장 생각이 맴돈다. 일하는 시간이 은 만큼 우왕좌왕하면 하루를 버리게 되니까 어떻게 하면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봐야 할 매뉴얼과 법을 생각하고 일의 우선순위를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렇게 집에서 일 생각을 하는 날이면 야근을 하며 하루 종일 일하는 느낌이다. 잘 때 빼고는 일 생각이다. 몸이 아파 이제는  두가 안나는 봉사활동을 일을 하며 할 수 있으니 이 직업이 좋다고 여기다가도 재활하면서 힘들게 다니고 있는데 허리는 안 좋아지고, 운동도 부족해지고, 이렇게 하루종일 끝내지 못한 일을 생각하, 일하는 도중에 발생한 감정과 표정이 마음에 남아 다른 것을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이게 맞나 싶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참 좋은 일인데 그 일이 나와 디스크를 짓누를 때가 있다.


22. 5. 31.

회사에서 번 하루치 급여보다 비싼 낙곱새 2-3인분짜리를 시켰다. 오늘은 그래야만 한다. 1-2인분짜리로는 해결되지 않을 피곤함이었다. 일하는 동안 화장실에 한 번도 못 갔다. 허리가 아프다고 아우성이었는데 일을 할 때는 허리는 뒷전이다. 파도 참는다. 허리를 모른체 하고 일에 집중한다. 머릿속으로는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는 생각뿐이다. 회사에서 못 돌봐줬던 만큼 집에 오기만 하면 허리가 더 칭얼댄다. 역시나 허리 육아는 쉽지 않다.


22. 6. 4.

친절함이 말라간다. 폭식으로 배는 부풀어간다.




22. 6. 7.

"왜 이렇게 몸을 망가뜨려 오셨어요."

재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수많은 생각이 스친다. 5천여 명의 신청역을 확인하며 전화 응대하다 보니 신이 몸에서 가출했다. 점점 몸에서 내가 멀어져 간다. 내 몸을 지킬 정신도 남겨놔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아 몸이 망가지고 있다. 재활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이다. 내가 과연 일을 하며 재활을 할 수 있는 걸까. 수중 걷기도 완전 멈춘 상태다. 못 간 지 세 달째다. 몸을 재건하는데 힘써야 할 시간에 몸을 망가뜨리면서까지 왜 일을 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볼 때다.


22. 6. 8.

잠을 자야 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 몸은 피곤한데 혼자만의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자꾸 자고 싶지 않다고 정신이 반항한다. 일단 눈을 감아볼까. 그럼 자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몰라. 아니 아니, 일단 먼저 불을 끄고, 유튜브 닫고, 눈에 셔터를 내리자. 모든 마음을 잠그자. 모든 유희와 지적 유혹으로부터 멀어지자. 적절한 잠을 자는 것 일을 하기 위함이지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 너무 억울해하지 말자. 아 근데, 왠지 일을 더 위한 것 같긴 한데, 아,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허리도 피곤하면 더 아프니까 참자. 적어도 1시에는 자야지.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새 나라의 어른이다. 어린이 때도 일찍 안 일어났는데. 헛소리 찍찍하지 말고 자자. 아침이 오는 소리를 맞이하자. 짹짹.


22. 6. 13.

아침 출근길, 진작에 왔어야 할 지하철이 안 온다. 지각하려나, 생각하는데 안내방송이 나온다. ".... 이용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싶어 검색하니 1호선, 자살, 연착 등의 단어가 보인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너무나 많다.


22. 6.14.

월급으로 파스 50개를 샀다. 복직일 다음날인 3월 3일에 구매했던 50개짜리 파스가 2개밖에 남지 않았다. 이걸로 며칠을 견딜 수 있을까. 파스도 업무처럼 분기별 지급이다.


22. 6. 15.

업무가 어느 정도 자리 잡혀서 예전 팀장님을 봬려고 연락드렸다. 출장을 나가시는 중이라 얼굴은 못 뵀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정겨다. 죄송했다. 아플 때 여러모로 마음 써주 분인데 이제야 연락드리다니. 얼굴 려고 그랬던 건데, 이렇게 통화만 할 줄 알았다면, 빨리 문자라도 드릴걸. 사과를 좋아하시는 우리 팀장님. 복직하기 전 팀장님께 드리려고 사두었던 비타민이 서랍장의 장식이 되어버렸다. 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챙길 여유가 나지 않는다. 좋은 사람들 잃고 있다.



22. 6. 28.

끝없는 고요가 필요하다. 소리도, 빛도, 그 어떤 것도 투과되지 못하는 청아한 침묵을 갖고 싶다.


22. 7. 2.

2년 동안 재활을 하며 쌓아놓은 몸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올해부터 앉는 법을 배우고 있었는데 다시 눕게 되었다. 앉는 재활을 하기에는 몸이 이전보다 안 좋아진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몸이 전만큼 돌아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전에 배웠던 올바른 움직임을 포맷한 것처럼 몸이 다 까먹어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해왔던 재활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일을 하면 왜 재활로 쌓은 바른 몸이 서서히 녹을까. 딱 4개월 일했는데 2년이 녹았다. 왜 이렇게 빨리 녹아버렸을까. 내 몸이 조금은 단단해진 줄 알았는데 살얼음이었나 보다. 살얼음판을 걷다가 풍덩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몸이 이렇게 안 좋아지는데 그만둬야 하나. 재활과 회사생활,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두 개의 철로가 평행선이라 가랑이가 찢어질 것만 같다. 양립은 어려운 것일까. 만두면 재활비와 생활비로 쓴 대출어떻게 갚아야 하나.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다.


22. 7. 12.

자꾸 회사가 꿈에 나온다.


22. 7. 20.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잘하고 있는 나를 사랑한다. 사람들은 모두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잘하고 싶어 한다. 잘하고 싶은 건 사랑받고 싶어서다. 나는 이제 사랑받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나를 조금만 좋아해도 된다. 내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해줄 거다.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파도 괜찮다. 파스 냄새가 나도 괜찮다. 나는 괜찮다. 사실 괜찮지 않다. 너무나 많이 괜찮지 않을 때가 있어서 힘들 때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살아갈 수 있다.


22. 8. 1.

나와 같은 길을 가는 낯익은 얼굴이 생겼다. 항상 같은 지하철을 타고 항상 같은 사람들을 본다. 버스노선도를 챙겨보지 않아도 그 사람이 타는 버스를 따라 탄다. 굴만 아는 출근메이트가 생길 정도로 익숙해진 출근길라니 간의 흐름이 피부로 와닿는다. 시간이 무섭게 달린다. 생각하지 않으면 이대로  살아가게 될까 봐 두렵다.


22. 9. 25.

자그마치 12시간 동안 행사 지원을 했다. 내 사전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활동시간이다. 침대에 누우면 떠오르는 마음의 소리. '이렇게까지 아프면서 살아야 되나, 포기하면 안 될까.' 자고 나면 잊힐 한순간의 기분일까. 아니면 영원히 나를 가두는 문장일까.



22. 11. 2.

싱그러운 초록색 단풍나무가 빨갛게 물들었다. 복직할 때 뜯었던 바나나향 새 비누를 거의 다 써간다. 재활과 회사 생활이 동시에 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매일 깨닫고 있다. 병행하면 허리 상태가 하향세로 가지 않기를 바랐는데, 바람은 바람뿐이었다. 현실은 바닥을 향해 가고 있었다.

재활 연습을 하면 그다음 날 회사 생활이 힘들어다. 결국 평일은 회사 생활만 겨우 하고 주말에 잠깐 재활을 겨우 한다. 재활까지 끝내고 나면 한주의 할 일을 다했다는 생각에 진이 있는 대로 다 빠져 주말에는 내내 쉰다. 이 생활 35번째다. 아무도 만나지 못했고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밥벌이를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재활, 즉, 몸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답이 없는 문장이 뺑뺑이 돌았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가 꽤 되었는데 아직도 벌을 받고 있다.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내릴 수가 없다. 나는 언제쯤 제대로 사람구실을 할 수 있을까. 답이 없다.


22. 11. 24.

"나 커피 마시는 거 안 좋아해. 너라서 마시는 거야."

갑자기 진심 공격이다. 직장 생활에서 진심에는 진심으로 받는 게 아니라고 책에서 배웠지만 한사코 난 진심으로 말한다.

"저도 점심시간에 커피 마시는 거 안 좋아해요. 누워있는 게 더 좋죠. 주사님 생각해서 마시는 건데요. 주사님 커피 안 마시면 머리 아프다면서요."

점심시간에 커피 마시는 걸 싫어하는 둘이서 서로를 위해 커피를 마시는 희한하고 요상한 직장생활이 계속된다. 그게 참 고맙다. 때론 이 고마움 덕분에 회사를 그만두기 싫어진다. 허리를 생각하면 멈춰야 하는데도 자꾸 회사가 다니고 싶다. 결국 '해야 한다'와 '하고 싶다'의 싸움이다. 평범하게 회사가 너무 다니고 싶었던 거고 허리를 위해 회사를 그만둬야 했던 거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은 이유는 점심시간에 먹기 싫은 커피를 마시기 위해서였다.


22. 11. 25.

왜 항상 내 허리 상태가 하락세일 때 일이 많을까. 선후관계가 바뀐 걸까. 하락세라서 일이 더 힘들게 느껴져서 그럴까.


22. 11. 28.

비가 온다. 내 눈에도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22. 11. 30.

꽃다발을 건넨다. 사진을 찍는다. 오늘은 우수공무원 시상식이 있는 날이다. 맨뒤에 서서 가지런히 앉아있는 그들을 이방인처럼 지켜본다. 그들 셔터스피드 1/8000의 4K 영상인데 나 1/1000 흑백무성영화다. 수우미양가 성적표를 매긴다면 나는 어디쯤일까. 보통 공무원인가, 반쪽 공무원인가, 도대체 뭘까.


22. 12. 15.

앉아 있지 못하는 나 답답해하는 사수를 위한 안식처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가 커피를 사서 이곳으로 온다. 벤치에 앉지 않고 느티나무 앞에 좌우로 서서 멀리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줄곧 이곳에 눈이 쌓일 때까지는 다니고 싶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었다. 새싹이 돋고 따뜻한 바람이 불던 봄에도, 매미가 울고 비가 오던 여름에도, 단풍이 들고 낙엽이 떨어지던 가을에도, 나는 자주 뜬금없이 "이 앞에 눈이 쌓였으면 좋겠어요."라고 얘기하곤 했다. 눈이 세상을 덮듯 근심을 덮고 이 눈이 녹을 때쯤 근심이 같이 녹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윽고 기다리던 눈이 왔다. 우산을 쓰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곳으로 향했다. 혼자 언덕에 서 눈을 맞이하였다. 버틸 수 있을까 싶었던 날들이 지나가고 고대했던 설경을 보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아파서 그만두게 될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아니라 그저 이 앞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가슴으로 느끼며 온전히 지켜볼 수 있을까. 그런 나를 기대해봐도 될까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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