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왔으면 좋겠다. 이 세상 모두 하얘지도록. 어두운 것들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도록.눈물과 고통도 눈에 숨을 수 있도록, 그렇게 사라지도록, 시간의 자취도 덮을 만큼 펑펑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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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서 도망치는 신부의 마음이 이해된다면 이상한 사람일까. 언제든 사라질 준비를 하며 살았다. 사람들은 내 책상이 깔끔한 걸 보고 정리정돈 잘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틀렸다. 나는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물건을 가져다 두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정리할 물건이 없고, 그래서 책상이 깨끗한 것이다. 최대한 짐이 없어야 떠나기 편할 테니까. 떠나기 위해 종이가방 하나면 충분했다. 불안한 삶,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삶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병(病)이 찾아오기 전까지 나란 사람은 역마살이 낀탱탱볼처럼 굴었다. 통통 튀어다니다가 안정의 정석이라고 일컫어지는 공무원으로 굴러들었다. 공무원이면 뭐하나, 몸이 아픈데. 불완전한 착지는 허리의 악화로 이어졌고 종착지는 응급실이었다.
떠나는 나를 보며 사람들은 물었다.
- 부모님 집으로 가는 거야?
- 아니요.
- 왜, 아프면 부모님 곁에 있어야지. 그럼 누가 돌봐줘.
- 아픈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아플 때 사람들이랑 있으면 안 아픈 척하게 되는데, 그게 너무 힘들어요. 그냥 혼자서 표정 관리하지 않고 아플 때는 아픈 표정 하면서 있고 싶어요.
웃음 속에 숨었다. 항상 웃으려고 했다. 힘들게 짜냈던 웃음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아픈 사람이 어떻게 웃냐."라는 말(語) 화살에 돌처럼 굳어버렸다.웃음은 멀리서 보는 제3자에게 흰 눈(雪)과 같았다. 가까이 보면 미세먼지가 끼어 있어 왜 이렇게 더러운가 싶어도 멀리서 보면 티 없이 말갛게 하얀 눈.
점점 더 오래 누워있어도 회복 속도가 전과 같지 않았고 통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늘었다.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못하고 혼자서 낑낑댔다. 일하는데 방해될까 봐 내 상태를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았다.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오해하도록 내버려 뒀다. 그저 혼자서 견디다 보니 이제 회사에만 도착해도 심장이 두근대고 허리가 아파 눈물이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찍 회사에 가서 이동하면서 상처 입은 허리를 치유했다. 휴게실 침대에 누우면 눈물이 자동 재생되었다. 그러다가도 동기를 만나면 미친년처럼 웃었다. 스스로가 무서워졌다. 혼자 있을 때는 미치도록 아파하고 말없이 있다가 사람이 있으면 밝게 큰 소리로 말하고 웃는 내가 어딘가 고장 난 것처럼 보였다.웃음은 고통의 메아리였다. 제대로 된 언어로 나오지 못한 응어리는 정신을 병들게 만들었다.스스로를 웃음으로 속일 수는 없었다. 이제 허리뿐 아니라 정신에도 아픔의 기척이 느껴졌다.
아프면서 혼자인 게 더 좋아졌다. 마음대로 아파할 수 있어서 편했다. 아프거나 힘들 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도 때때로 아기 캥거루가 되고 싶다. 이런 마음까지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기 힘든 게 현실이었다. 힘이 들면 들수록 더 혼자가 되었다. 아무도 곁에 오지 못하게 울타리를 쳤다. 어차피 내 옆에서 아무리 힘들어해도 나아지는 것은 내게 달린 일이었다. 아픈 것도 하루 이틀이지 맨날 아파서 누워있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을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병간호에 효자 없다는 말을 뼛속 깊이 공감한다.
내가 아픈 것도 힘들지만 아파하는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도 신경 쓰였다. 아파도 안 아픈 척하게 된다. 아파하는 표정은 주변 사람들의 오해를 낳으니까. 괜히 어제보다는 상태가 나은 것 같은 연기를 하게 된다. 상태가 후퇴하는 것을 알리는 것은 상대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것과 같았기에 그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결국 다른 사람들과 있을 때는 ‘괜찮은 척하기’가 습관이 되어 버렸다. 수술하고 나서도 간병인 없이 혼자 집에서 생활한 이유다. 서지도 못하고,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가는 상태로 천장만 바라보며 3개월 동안 텅 빈 눈으로 누워 있을 때에도 혼자였다. 아무에게도 내 상태를 전하지 않았다. 크고 작은 좌절을 누군가와 함께 나눌 자신이 없었다.
"나는 괜찮다. 나는 운이 좋다.”고 주문을 외우듯 말한다. 내가 말하고 내가 들었다. 언젠가 이 불행의 터널도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이렇게 아파도 조금씩은 낫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허리가 아프지만, 죽지는 않고 살아있고.
일상생활은 자유롭게 못하지만,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건 아니고.
아파서 일을 못하지만, 돌아갈 직장이 있고.
원룸에서 살지만, 곰팡이가 피지 않았고 창문도 있고.
돈을 많이 못 벌지만, 맛있는 것을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있고.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괜찮고, 이 정도면 운이 좋은 거라고 속삭였다.
집 밖에서는 긍정이로 활동하지만 사실 난 어둠의 자식이다. 빛이 있으려면 어둠이 있어야만 하는 법. 어둠을 감출 수는 있어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밖에서 반짝반짝 긍정의 불빛을 내고 안에서는 어둡고 어두운 암흑을 한 모금씩 삼켰다. 내 어둠을 잘라 늘어놓는 곳이 있다. 바로 '일기.hwp'다. 오늘의 우울하고 깊고 까만 생각을 노트북에 폭로하며 훌쩍거린다. 일기 속에서 어둠과 어둠이 차곡차곡 쌓인다. 다시 밖에서는 하하호호 깔깔마녀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을 거니까. 그렇게 난 괜찮아질 거라고. 집에서 종종 눈물을 흘려도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또 말했다.
괜찮다, 괜찮다, 주문을 외우던 날들을 지나다시 내팽개쳐졌을 때, 꾹꾹 눌러왔던불행과 인내가 터져버렸다. 벌거벗은 채로 자신과 다시 마주할 때가 온 것이다.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알면서도 생계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했고 이 안에서 버티는 것만이 능사인 것처럼 굴었다. 건강한 사람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난 아직 아픈 사람이었다. 함께하는 삶은 외롭지 않지만 괴로웠다. 정서적 외로움을 잠재우기 위해 육체적 괴로움으로 대신했을 뿐이었다.혼자인 시간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혼자가 되었어야 했던 것이었다. 속으로는 사람들을 원하고 또 원하고 있었다. 그저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을 유예한 것에 불과했음을 인정해야 했다. 동시에 그 마음과 행동이 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쾌락은 고통이었다. 무엇을 위해서 끈질기게 아픔을 견디고 있었던걸까. 이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도망은 약한 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용기였다. 왜 도망만 치냐고 강하지 못한 자신을 탓할 게 아니었다. 인생에 조금도 흠집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은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이 필요했다. 함께하는 삶은 내게 고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인정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3개월 동안 바닥에 철썩 붙어 누워있으면서 다짐하고 다짐했던 것이 '버티지 말자'였다. 그 다짐이 회사를 다니면서 입김처럼 사라졌다. 또 버티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쓰러진 지 1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시계를 보고 깨달았다. 깨질 듯한 머리 통증은 쓰러질 때 머리를 바닥에 부딪힌 증거였다는 것도. 이쯤 되니 내 주변의 모든 것이 낯설어지고 무의미해졌다. 눈을 뜨자 의식의 불이 켜졌다. 버티지 말자고 다짐했던 약속의 계절이 돌고 돌아 다시 온 것이다. 이파리에 서리가 희끗하게 맺힌 겨울이었다.
허지웅 작가는 암 투병 후 쓴 에세이 <살고 싶다는 농담>에서 혼자서 해내는 것을 훈장으로 여기며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하지도 못하는 바보 같은 삶을 산 것은 아닐까'라고 재평가하며 결혼을 할 수 있으면 하겠다고 말했다. 허지웅 작가의 모습의 모습에서 내 모습이 겹쳐지는 건 왜일까. 그의 마음이 무슨 마음인지 조금 이해가 간다. 생사가 걸린 병을 치유하기 위해 혼자 외로이 견뎠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분이지만 좋은 짝을 만났으면 싶고 앞으로 아프지 않고 잘 살기를 기도드린다. 나도 허지웅 작가처럼 언젠가는 누군가와 함께하자는 마음을 먹을 수 있는 봄날이 오기를 바란다.그마음의 씨앗은 싹을 틔우지 않았을 뿐 꽁꽁 언 땅 속 깊숙히 어딘가에 이미 심어졌을지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피울 때가 아니다. 다시 혼자로 돌아가야 한다. 저 멀리 숨죽여 기다린 겨울이 나에게 손짓한다. 다시 겨울을 노래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