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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몬스 Sep 09. 2022

병원에서 실종됐어요


척추전문병원 실험노트

- 실험체  : 과 뼈, 근육으로 이루어진 암컷. 인간. 28세. 현재 디스크 4-5와 디스크 5-1이 망가져 긴급 하자보수 요망.

- 실험 개요 : 일단 디스크 틈 사이로 새어 나와 신경 뿌리에 생긴 염증을 치료하기 위해 뼈와 뼈 사이를 벌리는 도구를 삽입한 후 뾰족한 바늘로 그 도구 사이로 염증 완화제를 투여.

- 실험 간격 : 3일, 1주, 3주, 한 달 간격으로 투여한 후 경과를 지켜볼 것 

 * 참고사항 : 근육이 약화되어 있으니 추후 근육강화제도 투여 고려

- 실험 경과

실험 1. 수술 시행

실험 2. 수면장애 증상이 발현되는 것으로 보아 통증이 나아지지 않고 있음. 진통제 처방 및 견인-전기치료 시행.

실험 3. 그 전과 비슷한 양상. 실험 2 반복 시행

실험 4. 실험 3 반복

실험 5. 차도 없음. 실험 3 계속 반복하 통증 경감 효과성 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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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10. 실패. 또 다른 실험 준비으나 실험 중단

- 실험 중단 사유 : 실험체의 연구비 지급 중단






'병원은 우리의 삶을 되찾아주는 곳이 아니고 그저 고장 난 몸을 고치는 곳이다.'  

이 한 문장을 수긍하 받아들이는데 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질병은 우리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의사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의사는 병원에 온 동안 잠시 오류가 난 몸을 봐주는 직업인이다. 의사 여러 고통을 묶어 질병의 이름을 확정 짓고 지은 이름에 따라 각각의 전통대로 내려오는 비법으로 약을 주거나 수술을 할 뿐이다. 그들에게 환자는 뼈, 피, 근육, 신경, 장기로 이루어진 세포 덩어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지도 모르며 심장박동은 그저 하나의 전류에 불과한, 일정하게 파동을 만들며 이어지는 선일 수도 있다. 


의사는 환자의 삶의 이야기 속에서 의학적 치료의 성공 여부를 입증해낼 뿐이다. 내가 원한 것은 삶이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기능하는 몸이다. 나는 일상을 찾길 원했고 그들은 내가 고장 나지 않은 채 살아있기만 바랐다. 나에게 그들은 밧줄이지만 그들에게 나는 밥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달랐다. 병원에는 삶이 없었다. 오직 치료뿐이었다. 그렇기에 의사는 말할 수 있다. 허리가 아프면 앉지 말라고. 이 얼마나 '앉아서 일하고 앉아서 밥 먹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삶을 고려하지 않는 답변인가. 아니지, 이 얼마나 치료에 입각한 철저한 대답인가. 치료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삶이 생략된 치료법을 제시하며 구원병이 되어야 할 병원이 앞장서 환자에게 박탈감을 안겨준다. 이미 삶으로부터 멀어진 그들이 의지할 곳은 병원밖에 없지만 그들은 그곳에서조차 눈물을 흘린다. 환자가 다시 일상적 삶과 가까워지기 위해선 의사에게 상처받아도 병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자신에게 진정한 구원자가 나타나길 바라면서. 그들에게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줄 몸을 달라 애원하며 실험일지에 차곡차곡 기록되는 것을 수용한다.


그러고 보면 의사와 환자는 참으로 이상한 관계다. 내 몸을 맡기면서도 내 몸에 대한 권리가 최소한으로 있을 뿐이다. 전적으로 의사에게 맡겨야 하며,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부당한 대우와 치료를 감내하기도 한다. 환자는 의사의 말을 듣는 대신 삶을 찾아주길 바란다. 그들은 그저 의료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환자는 이후의 삶을 기대하게 만드는 행위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이유로 의사의 행위가 실패했을 때 더 화가 난다. 믿고 맡긴 만큼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삶에 대한 원망은 때로 고스란히 의사의 몫이기도 하다.

나 또한 수없이 많은 치료를 받으면서 화가 나 눈물이 날 때도 많았다. 날 세포로만 보면 다행이었다. 날 돈으로 보는 의사도 있었다. 나아지게 한다는 명목으로 무리한 수술과 비싼 물리치료를 권했다. '완치'라는 곳에 이르지 못한 나에게 그들은 또 다른 방안 계속해서 제시하고 제시했다. 자신의 실패는 인정하지 않았다. 좋아지지 않았지만 좋아졌다고 말하며 낫지 않는 환자의 몸을 탓하는 의사도 있었다. 내 몸을 무작정  의사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낫기 위해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의료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고로 일을 하는지를 생각해야 했다. 사는 인간이 삶을 이어나가는 유기체임을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의 고장 난 신체 기관을 삶에서 분리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서도 조각조각 도려내어 그 부분만 살핀다. 허리는 허리, 뇌는 뇌, 자궁은 자궁, 어깨는 어깨, 목은 목. 인체는 그렇게 독립적 기관으로서만 존재하는 건 아니지만 현 의료체계에서 의사가 유기적 연결을 시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때문에 환자 본인이 찾아내야 한다. 또한 내 삶과 내 몸을 분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위로는 의사의 몫이 아니다. 병에 걸리지 않았던 지난 삶에 애도를 하는 것도, 현재의 삶에 불만을 느끼는 것도, 나만의 몫이다.


아파서 파스를 바르며 직장에 다녔건만 동료는 "OO씨 또 파스 붙였어? 으~ 냄새~"라고 핀잔 섞인 말을 한다. 이젠 '파스 붙였냐'는 물음 속에서 생략된 '으, 냄새~'의 맥락을 느낀다. 점점 파스 바르기가 두려워진다. 더 두꺼운 옷을 입고 사람들 앞에 서게 되고 이윽고 갑옷을 두른다.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다. 파스 냄새에 스스로도 상처받고 있던 중 빵을 사러 온 나에게 "파스 바르셨나 봐요? 어디 아프신가 보네요."라고 웃으며 아르바이트생이 말을 건넨다. 상처받은 마음에 후시딘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여주는 말이었다. 그 말과 캉캉춤을 추고 싶다. 몸에 두른 차갑고 무거운 갑옷 사이로 스며든 말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밖에서는 더 이상 파스를 바르지 않지만 집에서는 아직도 파스를 겹겹이 바르는 나는, 힘들 때마다 그녀가 했던 말을 꺼내 상처 위에 덮는다. 그 말을 자장가 삼아 본다. 때로 어떤 의사는 병원 밖에 있다.




※ 주의 : 병원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자신의 질병 원인 파악도 못하고 무작정 병원이 안 가는 것을 최선의 방안으로 여기는 아픈 선택은 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과도한 치료가 문제일 뿐,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꼭 여러 전문가의 소견을 듣기를 권합니다. 병원을 안 가거나 수술을 무작정 안 하는 것은 치료를 늦추는 어리석은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제때에 좋은 의사를 맞나 적절한 치료를 하는 것이 필자처럼 장기간 재활로 가지 않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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