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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Jan 13. 2024

우산

결핍과 쓴 맛의 보상.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 우산 깜장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 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 대고 걸어갑니다.

- 우산 동요 중
띠~리릭

오늘도 벌써 몇 번째 안전 안내 문자다. 짜증이 묻은 손가락은 거칠게 문자를 확인도 하지 않고 빠르게 숨겼다. 늦은 오후 점점 거뭇거뭇한 하늘이 집안을 가득 차고 들어오자 평소 비가 올 날씨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라 혹시나 하는 기대가 숨겨 둔 문자를 확인하게 했다.

눈, 비가 예상되니 도로 결빙구간에 대한 안전사고에 유의하세요.


나는 '눈'이라는 앞글자에 곧바로 안전 안내 문자에 대한 짜증이 사라졌고 쉽게 기대가 눈꽃 피듯 자랐다. 내가 사는 곳은 그만큼 적은 양의 눈 예보에도 가슴이 설레는 눈이 아주 귀한 곳이라 그랬다. 일기 예보는 50%로의 높은 확률로 기대했던 눈 대신 비를 내렸고 내 실망감도 급상승했다.


외출을 위해 중문을 열자 눈앞 바로 보이는 곳에 우산이 가지런히 걸려있다. 고급스러운 패턴을 가진 이단 우산과 깔끔한 단색의 삼단 우산 그리고 아들이 좋아하는 귀여운 캐릭터 패턴을 가진 장우산까지 종류도 가짓수도 많다. 한참을 그곳을 들여다보며 어떤 것을 쓸지 잠깐의 고민에 빠졌다 작고 가벼운 삼단 우산을 손으로 그러쥐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날도 그랬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거뭇거뭇한 울상을 한 하늘이었다. 외출을 위해 현관에 아무렇게 벗어 놓은 신발을 찾아 신으며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흐릿한 하늘에 우산꽂이부터 살폈다. 첫 직장에서 받은 첫 월급으로 나에게 제일 먼저 선물한 게 우산이다. 짙은 노란색을 닮은 따뜻한 겨자색의 긴 장우산으로 손잡이를 잡았을 때 편안한 느낌과 탄탄한 대 그리고 유려한 활이 구입 당시 내 마음을 확 끌어당겼다.


이날은 1박 2일의 일정으로 고향 친구들과 여행을 계획한 날이었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 잔뜩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가 가장 아끼던 우산을 집어 들고 현관을 나섰다. 어린 시절의 나는 비가 오는 날이 싫었다. 식구수보다 적은 우산은 항상 활이 꺾여 있거나 천이 찢어져 있었다. 등교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그마저도 없어 비를 그대로 맞아야 했으니 어린 나에게 우산은 가장 큰 갈망이었다. 그러니 튼튼하고 고급스러운 우산을 들고 외출할 때의 기분은 아무나 상상할 수 없는 충족감이 내 온 마음을 지배했다.


친구들 모두가 모이기로 한 타 지역으로 가는 시외버스 안, 차창으로 끝끝내 하늘이 쏟아낸 빗방울이 묻어나자 손에 그러쥔 우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다잡았다. 마중을 나오기로 한 곳에 내려 비를 피해 크고 튼튼한 고급 우산을 펼쳐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친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또 다른 친구들은 비를 피해 다른 장소에 모여 나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렇게 이동한 그곳은 내가 가장 좋아했고 아꼈던 우산과 친구를 버린 슬픈 곳으로 두고두고 기억에 남았다.


택시에 올라 친구가 말한 목적지로 기사님이 단숨에 우리를 데려다 내려놓은 곳은 높은 빌딩이 빼곡하게 숲을 만든 곳이었다. 발딩이 앞다투어 그늘을 만든 길은 어둡고 침침했다. 시골에서 상경한 어리숙한 나는 고개를 최대로 꺾고 올려다봐야 하는 높은 빌딩 앞에서 먼저 알 수 없는 두려움부터 느꼈다. 오죽했으면 빌딩의 입구 앞에선 내가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무섭도록 큰 입을 열어 사람을 집어삼키는 괴물을 마주한 듯했다.


그렇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내 상상과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이 편안한 얼굴들로 북적이고 있어 다소 안심이 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디에도 만나기로 한 얼굴들이 없어 또 다른 불안이 나를 그곳으로 데려온 친구들의 얼굴을 쳐다보게 했다. 쭈뼛쭈뼛하던 친구는 다른 친구들이 급한 일이 생겨 약속을 취소했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그리고 내가 미쳐 그 상황파악을 끝내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로 몰아넣어졌고 나처럼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의 소란이 가득 찬 상태로 건물의 꼭대기 층으로 옮겨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쏟아낸 사람들 주위로 검은 양복을 입은 한 무리가 에워싸자 소란스러움이 일순간 사라졌다. 나만큼이나 어이없어하는 사람들의 재빠른 눈치게임이 시작되는 듯했다. 그렇게 모두는 큰 회의실 같은 곳으로 옮겨졌고 곧바로 단상으로 터벅터벅 걸어온 덩치 좋은 남자가 우뚝 섰다. 그 사람은 쉴 새 없이 무어라 무어라 이야기를 했지만 이미 두려움에 이성을 잃은 나는 귓속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흡수하지 못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던 사이에 흐릿한 글씨가 복사된 용지에 반짝이는 코팅을 한 여러 장의 종이 묶음이 내 손으로 들려졌다. 놀란 두 눈을 껌벅이며 책자를 읽어 내려 가자 어렴풋이 상황이 정리되는 듯했고 서서히 이성이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당시 TV나 신문에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어 자주 기사화 던 다단계였다. 나는 '뭐야?' 하는 눈빛으로 양옆에 앉은 친구들을 돌아가며 봤다. 겸연쩍은 웃음을 보이던 친구들은 애써 나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두려움은 조금씩 옅어지며 황당한 마음에 자리를 내어주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다행히도 잃어버린 이성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생각하게 했다.


그들은 3시간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끝없이 대박을 이야기했다. 촌뜨기인 나 역시 매일매일 대박을 마음에 품고 살던 시절이지만 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한순간에 대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계속 다짐했다. 그러는 사이 완전히 이성은 나를 찾아올 때쯤 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우르르 옥상으로 밀고 올라가 각자의 지인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30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예의 없는 친구들에게 화가 나 앞뒤 따질 새도 없이 친구를 비난했다. 친구라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그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점점 격앙된 내 목소리는 높아졌고 그곳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사람이 우리가 앉은 테이블로 와 온갖 달콤한 말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이미 매스컴으로 다단계의 피해사례를 많이 접했던 터라 차갑게 식은 이성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끝내 그들은 오히려 나에게 '친구를 믿지 못하는 파렴치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퍼부으며 그곳을 떠날 수 있게 해 줬다. 서둘러 나는 그곳에서 벗어날 생각만으로 가장 아꼈던 우산과 우정을 버려두고 떠나왔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처음 와 본 낯선 곳에서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하다 공중전화를 찾아 울먹이며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고맙게도 한 시간이 훌쩍 넘는 거리를 단숨에 운전해 왔고 몇 시간을 불안에 떨었던 나도 따뜻한  차 안 공기와 다그치거나 캐묻지 않는 오빠의 마음에 의해 천천히 안정을 찾았다.


그곳으로 올 때와는 다르게 차창으로 묻어나던 비는 그쳤고 내 마음처럼 온통 새까만 어둠만이 있었다. 그 후로 들리는 소문에 동네의 다른 친구들이 적게는 몇백에서 몇천을 잃었다고 했다. 하마터면 나  역시도 소문의 주인공이 될 뻔했지만 다행히도 가장 아끼던 우산과 오랜 우정을 대가로 지불하고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우산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결핍에 대한 보상과 성인이 되어 우정에도 쓴 맛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고마움의 양가감정이 아닐지 모르겠다.


비 오는 이날도 풋풋한 이십 대의 내가 신중하게 우산을 고르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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