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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핑크뚱 Jan 04. 2024

이어질 수 없던 사이

키오스크에서 첫사랑을 본다.

두근두근! 쿵쾅쿵쾅! 삐질삐질!


동공은 최대로 커졌고 양볼은 뜨겁고 빨갛게 달궈졌다. 끈적한 땀으로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한 손 끝은 축축해져 화면 터치도 부자연스럽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며 알록달록한 화면의 다양한 상품들을 훑어봤다. 다들 자신을 선택하라며 번쩍이며 유혹하고 있다. 초조한 마음은 핸드폰 속에 고이 간직된 쿠폰 한도를 빠르게 확인하고 구매한도를 정해 적절한 상품을 클릭했다.


넓은 화면을 내 작은 눈으로 담기에 역부족이었을까. 찾지 못한 종료버튼 탓에 결제 방법의 오류를 수정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눌렀다 낭패감만 상승했다. 시간은 초조한 내 마음과는 다르게 여유만만하게 흐르는 듯했다. 그 순간 내 양옆으로 낯선 두 사람이 붙어 섰다.

도와드릴까요?


아들과 극장을 찾았다 키오스크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어리숙한 중년의 나를 발견한 관리 요원이 내 옆으로 서며 한 말이다. 빠르게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어색하고 민망한 미소로 긍정을 표현했지만 속으로는 내면의 나와 열띤 대화를 했다.

아니, 키오스크 메뉴 프로그램을 어떻게 설정했길래 이래.
아니야, 나도 이제 키오스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가 된 건지도 몰라.


이런 떨떠름함이 자꾸 나를 더 움츠러들게 했다. 친절하고 신속한 관리 요원은 나를 빠르게 다른 기계 앞에 세우고 몇 번의 손가락질로 아무 일도 아니란 듯 문제해결을 끝냈다. 허탈했다. 키오스크에서 뱉어진 번호표를 뽑아 멍하게 순서를 기다리며 가물가물한 아주 먼 옛날의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갑자기 건져 올려졌다.


아담한 키에 뽀얗고 앙증맞은 얼굴을 한 미소년 같은 이미지의 그 남자. 2년 전부터 옆부서 거래처 직원으로 사무실에서 자주 만나 눈인사만 주고받던 그를 내가 살던 아파트의 주민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나는 돈 안 들기로 유명한 짝사랑의 바다에서 운명이라는 그물로 그를 건져 올려 자주 상상하고 생각하며 아무도 모르게 마음의 크기를 넓혀가며 허우적였다.


그 당시 나는 용기가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숨기고 있던 마음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지만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했다. 누르고만 있던 마음은 우연한 회식자리에서 불쑥 튀어나왔고 옆 부서 부장님 귀에까지 단숨에 닿았다.


그런 마음이 있었으면 빨리 이야기하지 그랬어.
내가 그 사람에게 여자친구 있는지 물어보고 자리 한번 마련해 볼게.


부장님의 말씀에 수시로 두근두근, 쿵쾅쿵쾅, 삐질삐질하던 마음이 환희의 날갯짓을 하며 순하게 진정됐다. 곧 사랑의 신 큐피드의 화살이 그의 심장에 박혀 우리는 드디어 연인이 될 운명이라는 착각에 빠져 며칠을 행복하게 보냈다. 하지만 상상은 황홀했고 현실은 비참했다.


이제 곧 결혼한다는데.


부장님의 말씀에 긴 시간 품었던 애틋한 감정은 마치 터뜨릴 폭죽이 불발탄이 된 것처럼 허탈해졌다.


그때의 짝사랑과 지금의 키오스크가 묘하게 닮아 나를 작아지게도 하고 비참하게도 한 기분으로 영화를 봤다. 하지만 두 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 타임 동안 영화에 푹 빠져 키오스크 사건은 쉽게 잊혔다.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도 삶을 충실하게 살아오는 동안 언제 잊혔는지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냥 잠깐 스치는 감정에 좌절하지 말자. 우리는 이어질 수 없는 사이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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