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공은 최대로 커졌고 양볼은 뜨겁고 빨갛게 달궈졌다. 끈적한 땀으로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한 손 끝은 축축해져 화면 터치도 부자연스럽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며알록달록한화면의 다양한 상품들을 훑어봤다. 다들 자신을 선택하라며 번쩍이며 유혹하고 있다. 초조한 마음은 핸드폰 속에 고이 간직된 쿠폰 한도를 빠르게 확인하고 구매한도를 정해 적절한 상품을 클릭했다.
넓은 화면을 내 작은 눈으로 담기에 역부족이었을까. 찾지 못한 종료버튼 탓에 결제 방법의 오류를 수정하지 못하고이것저것 눌렀다 낭패감만 상승했다. 시간은 초조한 내 마음과는 다르게 여유만만하게 흐르는 듯했다. 그 순간 내 양옆으로 낯선 두 사람이 붙어 섰다.
도와드릴까요?
아들과 극장을 찾았다 키오스크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어리숙한 중년의 나를 발견한 관리 요원이 내 옆으로 서며 한 말이다. 빠르게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어색하고 민망한 미소로 긍정을 표현했지만 속으로는 내면의 나와 열띤 대화를 했다.
아니, 키오스크 메뉴 프로그램을 어떻게 설정했길래 이래.
아니야, 나도 이제 키오스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가 된 건지도 몰라.
이런 떨떠름함이 자꾸 나를 더 움츠러들게 했다. 친절하고 신속한 관리 요원은 나를 빠르게 다른 기계 앞에 세우고 몇 번의 손가락질로 아무 일도 아니란 듯 문제해결을 끝냈다. 허탈했다. 키오스크에서 뱉어진 번호표를 뽑아 멍하게 순서를 기다리며 가물가물한 아주 먼 옛날의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 갑자기 건져 올려졌다.
아담한 키에 뽀얗고 앙증맞은 얼굴을 한 미소년 같은 이미지의 그 남자. 2년 전부터 옆부서 거래처 직원으로 사무실에서 자주 만나 눈인사만 주고받던 그를 내가 살던 아파트의 주민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때부터 나는 돈 안 들기로 유명한 짝사랑의 바다에서 운명이라는 그물로 그를 건져 올려 자주 상상하고 생각하며 아무도 모르게 마음의 크기를 넓혀가며 허우적였다.
그 당시 나는 용기가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숨기고 있던 마음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었지만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했다. 누르고만 있던 마음은 우연한 회식자리에서 불쑥 튀어나왔고 옆 부서 부장님 귀에까지 단숨에 닿았다.
그런 마음이 있었으면 빨리 이야기하지 그랬어. 내가 그 사람에게 여자친구 있는지 물어보고 자리 한번 마련해 볼게.
부장님의 말씀에 수시로 두근두근, 쿵쾅쿵쾅, 삐질삐질하던 마음이 환희의 날갯짓을 하며 순하게 진정됐다. 곧 사랑의 신 큐피드의 화살이 그의 심장에 박혀 우리는 드디어 연인이 될 운명이라는 착각에 빠져 며칠을 행복하게 보냈다. 하지만 상상은 황홀했고 현실은 비참했다.
이제 곧 결혼한다는데.
부장님의 말씀에 긴 시간 품었던 애틋한 감정은 마치 터뜨릴 폭죽이 불발탄이 된 것처럼 허탈해졌다.
그때의 짝사랑과 지금의 키오스크가 묘하게 닮아 나를 작아지게도 하고 비참하게도 한 기분으로 영화를 봤다. 하지만 두 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 타임 동안 영화에 푹 빠져 키오스크 사건은 쉽게 잊혔다.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도 삶을 충실하게 살아오는 동안 언제 잊혔는지도 모르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