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 늘어지게 자고 싶었으나 습관은 무섭다. 새벽에 무거운 몸을 기어이 일으켜 책상에 앉게 했다. 이런 나 대신 아들과 남편이 늦잠을 대신 잤고 느즈막히 깬 아들이 내게로 와 귓속말을 했다.
아침으로 라면 먹고 싶어요.
얼마 전 미끄러져 다친 아픈 발목을 위해서도 아침은 라면이라는 요구가 어느 때보다 반갑게 느껴져 부스스한 아들을 꼭 안아주며 그러자 했다.
전날 과음한 남편은 얼큰한 국물. 꼬들꼬들 면을 좋아하는 아들은 국물은 적고 면은 많게. 우리는 끓인 라면을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가장 먼저 먹고 일어난 나는 개수대에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뒤늦게 다 먹은 아들은 한껏 기분이 좋아져 자신의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오며 엉덩이 춤까지 췄다. 그게 이날의 화근이었다.
뜨거운 라면을 먹느라 켜 놓은 선풍기. 팽팽하게 당겨진 전기선에 아들 발끝이 걸리며 기우뚱했다. 넘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모습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내 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릇에 담긴 라면 국물이 공중부양하다 그대로 자유낙하했다.
촤라락!
벌건 라면 국물이 싱크대와 바닥을 얼룩덜룩 수놓는 건 순식간이었다. 잠시 아들과 나는 얼음이 됐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나도 음식물 쏟을 때 있잖아.
툭 툭 툭! 얼음 녹는 소리가 나더니 금세 머릿속은 괜찮다를 수십 번 반복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별스럽지 않은 엄마를 보며 아들은 상황파악에 오류가 생겼나 보다.
참방참방
국물이 쏟아져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에발을 여러 번 담갔다 뺀 아들은 자신의 발자국을 바닥에 새기며 걸레를 찾는다며 돌아다녔다. 이곳저곳 고양이 발자국을 만든 모습에 정수리에잘 묶어 놓은 정신줄이 "뚝"하며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왜 그래, 네가 세 살 먹은 애기야. 빨리 욕실 들어가 씻어!
입으로 속사포 같은 말을 쏟아내며 걸레를 찾아와 바닥을 행주로 싱크대를 닦으며 끊임없이 잔소리를 뱉어냈다. 얼마 전에 다친 코끼리 다리처럼 부어 있는 발목은 무릎 꿇고 앉아 걸레질하는데 내내 통증이 내 기분을 더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러다순간 모든 상황을 방관자처럼 지켜만 보던 남편에게로 활시위가 당겨졌다.
당신은 너무 한 것 아니에요. 내가 아픈 발목으로 이러고 있으면 곧바로 걸레 뺏었어 대신 닦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정말 내가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억지로 막아 둔 감정이 무너지는 것은 정말 순간이었다. 씻고 나온 아들은 욕실에 들어가기 전보다 오스스한 냉랭한 분위기에 내 눈치를 살피며 어색해했고 남편은 '뭐야!' 하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여전히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이 꼴 보기 싫었다. 서둘러 뒷정리와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아 읽던 책을 펼쳤다.
하필 읽고 있던 책이 <스토너>였다. 눈물이 쏟아졌다. 소설 속 주인공 스토너는 불행한 결혼 생활과 자녀 문제에 고통스러워하지만 한 번도 아내를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으며 자신이 선택한 삶을 받아들인다. 소설 속 주인공 스토너가 이해된다기보다 순간순간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아 그가 비범해 보였다.
주어진 삶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이는야는 스스로 선택할 문제다. 이날은 내 선택을 후회하는 내가 싫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