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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끼 Apr 07. 2022

배병삼,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난세의 한 가운데서 仁義를 말하다.

 논어란 책 자체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自意로 읽은 것은 아니었고 당시 ‘독서’라는 과목이 있어 선정된 책을 읽게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당시에는 춘추시대나 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했기에 제대로 읽기는 어려웠다. 논어를 필두로 한 맹자, 대학, 중용, 흔히 말하는 四書는 맹자를 제외하고서는 공자의 述而不作 정신을 잘 이어받지 않았나 생각한다. 대학이나 중용에서는 논어와 시경을 워낙 자주 인용하고, 논어도 시경을 자주 인용하는 거 같다. 공자 스스로가 천명한 술이부작이 유교 경전에서도 잘 드러난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시작하기  프롤로그에서 사육신을 언급한 것은 논어를 읽기  마음을 다잡게 해주었다. 사육신하면 성상문이 지은 수양산에서 도라지  먹던 백이 숙제 이야기를  시가 먼저 떠오른다.  책에서 ‘사기에서의 내용도 많이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사기 열전의  번째 편이 바로 ‘백이 숙제편이다. 백이 숙제라는 형제가  무왕이 상을 멸하려 군대를 일으켰을  말고삐를 잡고 말렸다. 결국 무왕이 상을 멸하자 수양산으로 가서 도라지를  먹다가 굶어죽었다는 내용이다. 사마천은  열전을 저술하며 말미에 평생을 호화롭게 살다가 천수를 다한 도적 도척을 이야기하면서 의로운 백이 숙제는 굶어죽고 불의한 도척은 천수를 다하는 것을 비교하며 天意가 있느냐고 한탄을 한다. 백이 숙제는 이후로도 상당히 고평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선조  율곡이이가 당쟁을 막고자  ,   옳거나   그른 것이 어디 있냐고 비판을 받았다. 이이가   옳거나   그른 것이 있다는 예시로 주 무왕이  주왕을 정벌하려던 것과 백이 숙제가 무왕을 말린 것은   옳은 일이고, 춘추전국시대에 열국들이 서로 싸운 것은   그른 것이라고 말하였다. 유교문화권에서 무왕의 지위를 생각했을  백이 숙제가 상당히 고평가를 받는 것을   있다.


프롤로그에서 사육신을 읽은 후 들은 생각도 백이 숙제 이야기를 한 후 천의가 어디 있냐고 한탄하는 사마천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의리를 지킨 성상문 박팽년 등 사육신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의리를 저버린 세조와 신숙주 등은 천수를 누렸으니 정녕 하늘의 뜻이 어디 있을까?


유교 하면 떠오르는 두 글자는 忠, 그리고 孝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논어에서 忠은 그렇게 강조되지 않아서 의아하기도 했는데, 다시 따져보니 춘추시대에 忠을 바칠 곳이 있긴 했을까 한다. 주 天子는 유명무실해졌고, 각기 제후들은 탐욕을 앞세워 전쟁에 몰두하고, 그 밑의 대부들도 언제 배신할까 틈만 보고 있으니 공자가 누구에게 충성하라 가르치겠는가? 충성이란 개념도 아마 중앙집권적 국가가 생겨나면서 생긴 개념일 것이고 공자 당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선진 유학의 틀을 벗어나서, 유학이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시기는 前漢 시대에 가서야 가능했다. 유학이 동아시아의 대표적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것은 훨씬 이후의 이야기이다. 유학에서 충을 점점 높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효도 국가 통치에 유용하지만 충을 강조하지 않았으면 유학이 국가적 이데올로기로 채택되기는 힘들었으리라


돌이켜보건대, 효에 관해 부정적인 생각을 조금은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효는 사적 의리이다. 내 가문만을 앞세워서 가족 이기주의가 만연하는 것이 난세의 특징이 아니던가, 공적 의리인 충은 뒤로 한 채, 사적 의리인 효를 강조하는 역사의 영웅들을 보며 그런 생각이 쌓이지 않았나 싶다. 대표적으로 조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명목으로 서주에서 대학살을 벌인 일과 사마의 가문의 일이 있다. 사마의에게 효와 충, 두 가지 가치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사마의는 주저 없이 효를 고를 것이라 생각한다. 사마의에게 일생에서 언제나 중요했던 것은 나와 가족을 지키는 것이다. 이게 뭐 나쁜 것이라 할 수도 없다. 현대인 대부분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함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마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출세를 했고 군주를 섬겼으며 제갈량과 겨루어도 보고 말년에는 정변도 일으켰다. 개인으로는 그걸 나쁜다고 할 수 없겠지만 시대의 입장에서는 그냥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행동을 하다 보니 결국 천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천하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목적성이 애당초 결여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대는 그 시대 나름의 사명이 있고 그 시대에 천하를 가진 사람은 나름의 사명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물론 공자는 효가 사적 의리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해결책을 제시를 했다. 가족에서 이웃으로 사회로 점점 효가 확장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긴 하나 결국 당대는 가문의 안위와 본인의 안위가 일치되는 시기였던 것을 감안해 보면 효가 사적 의리로 빠지는 것이 막기는 힘들지 않았나 싶다. 그것보다는 공자가 주나라 천하의 회복을 부르짖었던 것을 주목해 보고 싶다. 공자가 생각한 공적 의리는 권력자나 국가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후대의 변질된 충과는 달랐던 것 같다. 그래서 忠 자도 별로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공적 의리는 天이었던 거 같다. 서두에서 우리가 백이 숙제와 사육신을 볼 때 항상 생각하던 그 질문, 과연 하늘의 뜻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공자는 단호하게 있다, 있으니 거기에 마음을 다해라라고 말하고 있는 거 같다.


요순에서 우로 또 탕으로 문왕에서 무왕과 주공으로 이어진 그 天命을 공자는 굳건히 믿었다. 사실 유학은 상당히 도덕주의 면모가 많아서 춘추시대 같은 난세에 平天下 하기는 어울리지 않는 이념이다. 공자도 현실 경세가로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혼란상을 한탄했으나 이후에는 더한 전국시대가 펼쳐진다. 그리고 결국 천하를 통일한 것은 법가를 앞세운 진나라였다. 유학은 그 이후로도 천하를 얻기 위한 학문이 아니라 다스리기 위한 학문으로 많이 기능을 했다. 춘추시대라는 난세의 한 가운데에서 시대와 사뭇 어울리지는 않아 보이는 仁義를 묵묵히 외치고 요순에서 이어져 온 天命을 굳게 믿으며 살아온 공자를 보며 시대와 부합하기 위해 노력한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는 거 같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맹자’에서 공자를 평할 때 나아갈 만할 때 나아갔고, 물러날만할 때 물러갔다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때를 알았다는 평을 읽은 기억이 있다. ‘맹자’를 읽을 당시에는 자기 보신을 잘했다는 말인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으나 공자의 모습을 다시 보고 그 문장을 떠올리니 어쩌면 그 난세에 유일하게 天意를 깨달은 공자를 극찬하는 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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