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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 Nov 07. 2021

불행의 과장법 [모순]


양귀자 _ 모순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量感)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_15p





소설의 주인공 안진진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그녀의 어머니 인생을 들춰야한다. 진진의 어머니는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났다. 두 자매는 얼굴, 성격, 학교 성적까지 똑같았다. 한 사람 같았던 둘은 결혼과 동시에 두 사람으로 나뉜다. 세상의 행복은 이모에게, 불행은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빗물 새는 단칸방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와 비단 잠옷을 입고 침실에서 나오는 이모의 얼굴은 같았지만 가난한 세월은 이모보다 십 분 먼저 나온 어머니를 이모보다 십 년은 먼저 태어난 언니로 만들었다.



소설은 두 가지 축으로 돌아간다. 하나는 어머니와 이모. 두 자매의 대조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진진의 연애사이다. 진진은 현재 두 남자를 만나고 있다. 그녀는 사랑과 결혼의 모순을 깨닫고 자신의 의지로 미래를 선택하고자 한다. 두 남자는 어머니와 이모의 달라진 궤도처럼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나영규'는 유능하고 빈틈이 없는 남자로 이십대의 마지막 해에 아내를 맞아들인 다음 서른 살 어른이 되겠다는 계획을 이루고자 자신의 29번째 생일에 진진에게 청혼할 만큼 계획적이고 독단적인 사람이다. '김장우'는 야생화 사진작가로 사랑이 넘치는 로맨티스트이다. 흐릿한 그와 있으면 진진은 선명해진다. 하지만 그는 가난하고 앞으로도 쭉 가난할 예정이다.



안(not) 진진(眞眞). 모순적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소설은 대비되는 상황을 펼쳐두고 질문을 던진다. 어머니와 이모, 나영규와 김장우,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풍요와 빈곤... 상반되는 단어들. 잇따르는 반대어. 무엇이 옳은가. 진진은 분기점에 서있다.



책의 핵심은 진진의 남편찾기가 아니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선택에 이르기까지 교차한 수많은 모순이 아니었을까.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누구를 선택하든, 모순은 사라지지 않는다. 선택하지 않은 상황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선택이 행복을 가져올지는 살아보고 나서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_127p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이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_188p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_178p





행복과 불행이 교묘하게 뒤섞인 일상은 내게도 적용되는 배경이다. 오늘 치의 다짐과 번복, 솔직과 거짓 사이를 생각한다. 나도 엄청난 모순덩어리구나. 책을 읽는 동안 어쩐지 진진보다 이모에게 마음이 쓰였다. 이모를 보고 있으면 박완서 작가의 <지렁이 울음소리>가 떠오른다. 화목한 가정, 누구나 부러워하는 일상 속 '나'는 권태와 행복에 지쳐버린 인물이다. 권태감에 저항해 보지만 내 목소리는 지렁이 울음소리와 같을 뿐이었다.






"아아, 심심하다는 것은 불행한 것보다는 사뭇 급수가 떨어지는 불행이면서도 지독한 불행일 때가 있다." _<지렁이 울음소리>



"어려서도 평탄했고, 자라서도 평탄했으며,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에는 더욱 평탄해서 도무지 결핍이라곤 경험하지 못하게 철저히 가로막힌 이 지리멸렬한 삶" _<모순>




책과 책이 연결되는 지점을 만날 때마다 형용하기 힘든 감동을 느낀다. 덕분에 아득한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풍요롭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고, 빈곤하다고 불행한 것도 아닌 삶의 모순. 평행우주의 또 다른 나를 볼 수도,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삶은 지난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책을 덮고 미래를 그려보았다.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아직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일까. '체험된 후'에 다다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다시 이 책을 꺼내 읽고 싶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_2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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