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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떤 May 20. 2023

잠자는 숲속의 워치




회사에 스마트워치 바람이 일었다. 이게 뭐라고. 책을 제외하고는 옷이든 신발이든 크게 욕심을 내지 않는 편인데, 함께 일하는 직원들 손목에서 번쩍번쩍 존재감을 과시하는 워치를 보고 있자니 묘한 압박감과 부러움이 들었다. 솔깃해 하는 나에게 직원들이 다가와 속삭였다.



"휴대폰 화면 안 켜도 워치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어요." 

"이번에 워치 케이스랑 스트랩 샀는데 어때요?" 

"전 모델은 가격도 착해요.



내 귀는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들마냥 팔랑팔랑 거렸다. 아니야, 안사면 100% 할인이야. 한두 달 쓰다 말겠지. 견물생심. 이 또한 지나가리. 소비를 부추기는 욕심 자아와 미니멀리시트 만족 자아가 치열하게 부딪쳤다. 결국 기가 막히게 좋은 자본주의의 속삭임, '나에게 주는 선물'에 만족자아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곧장 매장으로 향했다. 평소의 밍기적거림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새하얀 박스를 조심스럽게 뜯어 스마트워치를 영접한 순간, 영롱하다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비싼 게 좋기는 좋구나. 탁월한 성능과 심미성에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마르고 닳도록 써야지. 과연 스마트워치는 제 몫을 톡톡히 할 줄 아는 녀석이었다. 전화가 오면 손목에서 웅웅 진동이 울렸다. 덕분에 부재중 전화가 찍힐 일이 없었다. 걸음 수도 측정도 해주고, 활동량이 줄면 운동하라고 재촉도 했다. 블루투스로 간단한 조작이 가능하니 휴대폰 화면도 덜 보게 되는 것 같았다. 이름대로 똑똑한 시계였다. 



예상치 못한 문제가 불거졌다. 내게 불안증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손목에서 직접적으로 울리는 진동은 느닷없고, 갑작스러웠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어깨가 빳빳하게 굳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아무 일도 아닌 작은 진동이 나에겐 심장 박동을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려고 산 게 아닌데. 무음으로 설정을 돌려보았지만 불규칙한 심장은 널뛰기를 반복했다. 결국 워치를 풀었다. 그래, 싫으면 어쩔 수 없지. 튀어나오려는 불안에 귀를 기울였다. 몇 번 나비효과(불면증, 호흡곤란, 어지러움)를 겪은 후 불안이 보내는 신호를 얌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리해서 힘들어지는 건 나였다.



불안은 긴장을 싫어한다. 낯선 길을 운전하거나 경험하지 않은 일 앞에선 시끄럽게 경종을 울린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경보장치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런 문제를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자신감을 잃는다. 친구들과 낯선 동네에서 만나기로 한 날, 불안은 어김없이 못 간다 배짱을 부렸다. 혼자도 힘든데 친구까지 픽업하는 일정이라 빼액빼액 난리를 쳤다. 내 마음인데 왜 안 따라주는 거야, 장난감 코너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는 아이를 바라보는 심정이었다. 



내가 졌다.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택시를 잡아탔다. 약속 장소로 가는 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건넨 말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글을 쓰거나 산책을 하면 괜찮아진다더라"

"부모님에게 이야기하자"

"좋아하는 일은 어때"



당시엔 진심으로 건넨 이야기였지만 돌이켜보면 당사자에겐 책망처럼 들리지 않았을까. 나에게 대입해 본다. 산책을 해서 불안증이 없어진다면 마라톤을 뛰었겠지. 역지사지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날 이후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불안을 털어놓았다. 나 역시 내 마음대로 안되는 감정이 있더라, 친구는 오히려 고맙다고, 위로가 된다고 답했다. 터진 둑처럼 증상을 쏟아내는 동안 친구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침묵이 주는 따스한 공감에 눈물 콧물 빼는 밤이었다.  



상처와 이해는 동전의 양면이다. 불안 때문에 잠 못는 날도 있었지만, 힘내라는 말보다 힘들었겠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 퍽 마음에 드는 일이다. 그래도 불안아, 워치 정도는 어떻게 안될까. 그거 비싼 건데. 오늘도 참을 인을 새긴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 아니 잠자는 상자 속의 워치가 눈뜨는 날을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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