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냐고 카톡을 보냈다. 두 달 만이었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엄마와 나 두 사람 모두와 친분이 있는 지인이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어젯밤에 엄마가 그녀에게 나의 결혼 소식을 먼저 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한때 힘들어하던 나를 지지해주었던 사람인데 이렇게 내 소식을 접하게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싶었다. 간단한 메시지 한두개를 보내면서도 내심 걱정했다. 혹시라도 연락이 뜸하던 나를 책망하거나 하진 않을까. 답장이 오는 데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후로 끊임없이 도착하는 메시지는 책망은커녕 열렬한 축하의 인사들로 가득했다. "좋겠다, 좋겠다"를 연발하던 그녀는 덕담과 더불어 신혼집에 어울리는 소형 가전을 하나 사주겠다고 했다. 자신이 이용했던 스드메 업체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아울러 그녀는 이전 통화에서 자신이 실수했던 부분에 대해 거듭 사과했다.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계속 그랬다.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녀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의 손절 리스트에서 최상위에 올라있던 사람이었다.
나는 친구가 적다. 지인조차도 많지 않다. 나의 카톡 친구 리스트에 있는 사람 수는 고작 30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 중에 업무상 등록되어있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실제 친구나 지인이라 할만한 사람들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물론 친구가 정말로 한 명도 없던 외톨이 십대 시절을 보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옛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이를 한살 두살 먹으면서 곁에 있던 사람이 하나 둘 없어지더니 결국엔 또 다시 이 모양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의 됨됨이를 가늠할 때는 보통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본다. 이와 같은 잣대에 따르면 나는 썩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닌 셈이다. 외톨이가 될 운명이란 게 어디 있는 것도 아닐텐데, 나는 어쩌다 이렇게 인간관계에 문제 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던 특정 시점엔 죄없는 나를 사람들이 밀어내기도 했었지만, 언젠가부터는 새롭게 다가오거나 곁에 있었던 이들을 오히려 내 쪽에서 일일이 쳐냈던 것 같다. 즉, 현재의 상태는 내가 손절을 남발한 대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왜 그렇게 손절을 일삼았던 걸까? 그 이유들을 크게 나누자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가 있지 않을까 한다.
맨 먼저 떠오르는 이유라면, 내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서운함이라는 감정이다. 나는 일상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서운한 마음을 품을 때가 아주 많다. 이유는 별 거 없다. 간만에 안부 인사 카톡을 보냈는데 답장이 느려서, 읽고 답장을 하지 않거나 카톡창의 1이 없어지지 않아서, 한번 만나자고 했는데 정작 내 쪽에서 약속을 잡으려 하면 자꾸만 뒤로 물러서서, 나한테 먼저 연락을 해오지 않아서. 이런 일이 왜 자주 벌어지냐 하면, 내가 그저 적당히 아는 사람일 뿐인 지인과 정말로 친밀한 관계에 놓인 친구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와 같이 서운한 순간들이 생겨나는 건 당연하다. 애초에 그들에게 나는 썩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이들을 똑같이 생각하고 느슨하게 대하면 될 텐데, 너무 많은 것들을 혼자 기대하고 그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면 크게 실망해서 관계를 끊어버린다. 어제의 지인이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지인이 되기도 하는 현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지금 내 주변에 친구나 지인이 많다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그 다음 이유라고 할만한 건, 어딘지 과도하게 방어적이고 예민한 나의 태도이다. 앞선 문단의 내용과도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다. 나는 아득히 먼 옛날부터 인간관계 앞에서 매번 서투르고 어색했던 사람이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것인지 삶의 첫 기억이 머무르는 그 순간부터 이미 그랬다. 이렇게 뿌리 깊은 내향성은 사는 내내 나를 괴롭히고 고뇌하게끔 만들었다. 단지 사람에게 서투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주먹질과 발길질을 당했었다. 어떻게든 이 기억을 떨쳐내보려고 미친듯이 사람을 만나고 다니기도, 그로 인해 진한 행복과 슬픔을 함께 느껴보기도 했다. 내 삶에서 인간관계란 풀어도 풀어도 난해한 수학 공식과도 같았다. 그렇게 자주 다치면서도 사람을 찾아다니던 이십대를 지나고 나니, 더 이상은 새로이 뛰어들 공간도 그러할 자신도 없었다. 결국에는 상처받기 싫다는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데에 이다지도 기나긴 수식어들이 필요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다름 아니라 나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협함이다. 나는 언뜻 매우 열려있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질 못한다. 한때 그토록 싫어하던 유형의 사람들과 내가 사실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고 있다. 따지고 보면 앞서 말했던 모든 문제들은 발상만 바꾸면 어이없을 만큼 쉽게 풀리는 것들이다. 저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걸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거기에는 난해함도 고민도 없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인정할 수는 있는 게 사람이다. 그가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그 사람은 나와 다른 것이다. 그가 연락하는 텀이 너무 긴 것 같다고? 그 사람은 나와 다른 것이다. 내가 호의적으로 다가가는 만큼 나에게 그만큼의 감정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그 사람은 나와 다른 것이다. 머리로는 초등학생조차 이해할만한 사실이지만 막상 가슴으로 이해하기에는 나이가 제법 든 지금도 쉽지 않은 진리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서 거의 모든 마음고생이 시작된다.
사람이 자기 객관화가 되어 있다면 문제를 반쯤 해결한 것이나 다름없단 얘기를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얘기가 세상에 둘도 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서 구체적으로 뭘 뜯어고쳐야 하는지 자각하는 일은 변화를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걸 아는 것만으로 뭘 어떻게 바꾼단 말인가. 비만한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이 뚱뚱한지 이미 알고 있듯 나도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며, 오늘은 단지 그걸 정리해보았을 뿐이다. 사람 성격을 한순간에 고쳐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내가 또 다시 사람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손절의 기로에 맞닥뜨릴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해야 한다. 내가 저 사람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는 없을지, 그의 장점과 단점들 모두를 안고 갈 수는 없을지, 정작 나라는 인간이 그에게 괜찮은 사람일지 아닐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