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글쓰기-색>
늘상 듣고, 묻던 질문이었다.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가요?"
하지만 그녀의 대답을 들은 이후로 난 더이상 그 질문을 하지 않는다.
24살 유네스코 IYC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워크 캠프의 일종인데 우리 나라에 다른 나라 아이들이 와서 2주일 동안 함께 지내며 봉사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주제는 농촌 일손돕기, 습지 환경 보호, 교육봉사, 노인 봉사 등이 있다. 캠프 한달 전 한국 참가자들 워크샵이 있었다.
대부분 대학생이고 직장인은 나 혼자 뿐이었다.
가기 전부터 내가 나이가 제일 많을까봐, 나만 직장이라 잘 어울리지 못할까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멤버들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늦게 오는 나를 열정적으로 환영해주었다.
강사님이 나에 대해 미리 이야기를 해놓은 것 같았다.
다행히 두살 많은 언니도 한명 있었고 대학생들이지만 군대를 다녀와서 나와 동갑인 친구들이 많았다.
그곳의 아이들은 모두 E성향을 가진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편하게 말을 잘 걸었고 모두 열린 마음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다.
학교에서 나이든 선생님들과 생활하다 비슷한 성향, 또래들을 만나니 기분이 업되며 마냥 신이 났다.
1박 2일 동안 봉사 프로그램을 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하는 것들에 대해 배웠다.
나라별 음식에 대한 준비, 주말에 여행다닐 때 주의해야할 사항, 서로 의견일 다를 때 조율하는 방법 등...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나도 의견을 내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내 입을 틀어막는 한 가지 난관은..영어였다.
강사님은 프로그램에서 일어날 문제 상황을 주고 어떻게 해야해야할지 역할극을 하게 했다.
문제는 영어로 해야 한다는 것.
다른 나라 아이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니 지내면서 영어를 사용해야하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워크샵에서..
한국어로 지금까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영어로 이야기해야하니 너무 어색했다.
학창 시절 주구장창 영어 공부를 하고 이걸 준비하느라 회화학원도 몇달째 다니고 있었는데도 당최 한마디가 생각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두 영어로 쏼라 쏼라 이야기를 하는데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답해야할 지도 몰라 얼굴만 빨개지고 대충 아는 단어만 반복하다 무대에서 나와 버렸다.
얼마나 창피했는지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이마에 땀이 나고 숨고만 싶다.
다음 팀에 그녀가 등장했다. 165cm는 되보이는 큰 키에 커트 머리, 눈은 2/3만 뜨고 절도 있으면서도 우아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역할극이 시작되고 그녀는 문제 행동을 하는 상대 배우에게 다가갔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우아한 목소리 그대로 차분하게 그렇게 하면 안된다며 영어로 긴 문장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끊김없이 이야기했다.
아...사람이 저렇게 우아할 수 있구나.
그 순간 그녀에게 반했던 것 같다.
다음은 원대형으로 서서 이동하다 만나는 사람과 짝을 이루고 주어진 질문에 대해 답을 하는 활동이었다.
드디어 그녀와 짝이 되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은 "좋아하는 색이 무엇인가요?"였다.
내가 먼저 대답을 했는데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파랑이라고 했을 거다.
그 당시에 내가 하늘 보기를 자주해서 파랑색을 좋아했으니까.
그녀의 대답은 "전 색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생각해요. 색은 각자 그 나름의 개성이 있어요. 어떤 색을 고르라는 건 저에게 너무 힘든 일이에요. 전 세상의 모든 색을 다 좋아해요."
이렇게 우아한 대답이라니...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미대에 다니고 서양화를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좋아하는 색이 무엇입니까?"하는 질문이 유치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색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색에 대한 모독이다라는 생각이 들며 원래 그게 내 생각이었다는 듯 그녀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화되었다.
그녀의 말에 설득되었다기 보다 아마도 그녀가 가진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것 같다.
'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항상 그녀가 떠오른다.
단 한번의 만남이었지만 20년이 지나도 생각나게 하는 누군가를 압도할 수 있는 강렬한 분위기...
나는 평생 가져보지 못할 아우라..
그녀도 결혼을 하고 애 엄마가 되었을까?
누군가 본인을 이토록 멋있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나도 꼭 한번 가져보고 싶네 그 아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