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내 팔에 꽂은 주삿바늘에 난 잠이 들며, 그렇게 가슴 속 깊은 곳 재워둔 말들을 끄집어낼 지도 모르는 걸.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호텔 로비 한 편에 앉아 있던 라 부장이 뭔가를 본 듯 문 쪽을 향해 고개 돌렸으며 난 그 모습을 봤다. 유리 벽 너머를 보고 있는 라 부장이었다.
그 걸음걸이마저 연기인 듯, 지금 당장 카메라를 갖다 대 조명을 비추면 영화 속 한 장면이 될 수 있을 것처럼. 호텔 앞 세워진 검은 자동차는 곧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 여배우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고 자기 그 모습을 프레임으로 옮긴 뒤 떠날 듯 이 세상 한가운데에 있듯, 그건 눈앞의 현실이었음을.
내 앉은 자리로 걸어오는 그 여배우의 모습은.
"만나 뵙게 돼 기쁩니다."
그 눈은 까맣게 가려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자기 눈동자를 감춘 걸 벗은 뒤에야 그 눈을 보고. 그 여배우와 난 몇 분 동안 대화도 않고 커피잔만 만졌다. 식어 차가워지기 전에, 얼른 떠나려는 마음에 난 그런 말을 준비하고 말했다.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함께 일해보고 싶다고.
꼭 대본을 읽듯 난.
“실례합니다.”
봉사원이 물을 가져왔지만 그 눈은 흔들리고 물잔을 내려놓는 손은 부들부들 떨린다. 그게 연기라면, 감독이라면 그는 그 상황에서 당장 컷을 외쳐야 할 테다.
다른 자리에서 들려오는 중국인들의 대화 소리는, 그들 사이 무슨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지 난 알 수 없었지만.
몇 년 전 랴오닝성의 당서기가 이곳을 다녀간 뒤 중국인 관광객의 수는 부쩍 늘었다고 하며. 그 소리들이 전해 들려오지 않았다. 장은호가 자리를 뜨자 여배우는 한쪽 다리를 꼬았고 한쪽 무릎이 뾰족해졌다.
여배우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6층의 끝방으로 가고 난 따라 걷는다. 복도 한가운데에 멈춰 서지만 다시 문 앞으로 다가서고.
문을 열었을 때 그 여배우는 다리를 꼰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다른 쪽 무릎이 뾰족해진다. 여배우가 말한다. 당신은 이미 경계를 넘어온 게 아니냐며.
여성이라는 상대는 늘 반대로 묻게 했기에. 그곳에서 난 그 여배우와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 투숙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당신이 감독인 영화에 있고 싶다는 말을. 두 얼굴이 겹쳐 보이며 난 초점을 잃고 만다. 그 여자가 한국인이었는지 조선인이었는지는 아직도 알 길 없지만. 카메라가 돌며 벽에 붙은 귀가 그 소리들을 기록한다.
'당신 10대엔 어떤 일이 일어난 거예요?'
이불 속 숨긴 그 가늘고 여린 팔을 만지자 내게.
'왜 묻는 거죠?'
남은 고통의 흔적을 느껴보고 싶었기에. 그러자 다시 내게.
'그럼 당신은요?'
반대로 쏘아붙이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두 남녀는 지금 멈춘 시간 속에 있다. 난 주위를 볼 수 없고 먼 과거 앞으로 벌어질 일들마저 예측하지 못하게 된다.
'이게 당신 영화인가요?'
어느 순간 그 여자가 내게 그리 말하듯. 그러나 난 멈출 수 없음을. 남자라는 반대는 늘 투쟁해야 했다. 난 기계처럼 돌고 또 돌아 멈출 수 없다.
그 시계 안에 그 여자의 형상이. 그 인물을 꾸며낸 건 다름 아닌 나였으며. 영해, 그 여자는 깊고 푸른 물에 빠진 여자였다.
그 물속으로 스며들듯 내려 앉는 내 모습이. 죄 지음에 고개 들지 못하고 곧 그 앞에 무릎 꿇을 난.
그런 캐릭터를 또 한 번 구축할 자신은 없기에, 이곳에서 난 연기자인 듯하며 감독이 원한 연기만 남긴 채 떠날 듯, 미련 없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배우의 입을 통해 난 말하고는 했다.
"깊은 우물에서 노래 부르면 살아남을지 몰라요. 슬픈 노래를 부르면요."
영해를 연기한 건 이윤정이었다. 그 여배우를 처음 본 건 여객선이라는 제목의 TV 드라마에서였으며.
10대의 나이에 교복모델로 얼굴을 알렸고, 그때 그 배우는 스쳐가듯 얼굴을 비추던 배우였지만 난 그 대사 한 걸 잊지 못했다. 그 입술의 모양 색깔마저 지울 수 없었다.
"낭떠러지에 선 그 남자를 봤어요."
그 드라마 한 편 때문에 배 타고 바다까지 건너 그 바위 위에서 그런 대사를 되뇌인 게. 그때 난 그랬다. 그날 거문도 날씨는 참 맑았다.
이윤정을 다시 만났을 땐 더 자라 이미 큰 별이 돼 있었다. 한편으론 화려한 표정 뒤 맴도는 그 여자의 우울함을 목격했고. 그 여배우과 함께 했을 때 난 꿈을 이룬 것이었음을.
이윤정은 사람들과 함께 밥 먹는 걸 좋아했다. 먼저 다가갈 사람은 몇 없었지만. 들판 위의 꽃처럼 늘 혼자였지만.
"침대 위에 홀로 있지 마오."
그 모습이 내게 그런 시상을 떠올리게 해 난 시인처럼 한 문장을 긋는다. 그 문장을 소리로 듣게 한다. 끝내 사람들이 보게 한다.
등 뒤로 감춘 그 손은, 어디에도 기대서지 않은 채 말하던 그 여자가 다가간다. 그곳 앞에 서서 말한다. 낭떠러지가 보인다고. 그 대사를 그 입술로 움직여 말하게 했을 때 난 오른손을 불끈 쥐고 말았다.
그 푸른 우울함은 어두운 빛을 받을 때 더 반짝였다. 그 여배우와 함께한 그때 내 날들이. 대한민국의 여배우, 그러나 한 줌 가루 되어 사라지고 떠난.
그 여배우가 남긴 마지막 인물 영해는 많은 사람들 감수성을 자극하고야 만다. 이윤정 유작의 개봉 뒤 그 우울함은 이미 자신의 몸 전체로 퍼져나간 뒤였고, 스스로 목을 조여 숨을 끊은 그 순간까지 오게 됐을 때 난 처음 그 배우를 본 순간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사람들은 내게 이야기했지만, 그 여배우와의 마지막 작품에서의 남은 것들을 묻곤 했지만.
그 목소리를 지울 수 없는 건, 여객선 위의 그 모습조차 물 아래 깊은 곳에서 잠망경을 통해 바라볼 모습 같기에.
기억은 그렇게 눈 앞에서 멀어지고 또 사라진 뒤 추억이 된다. 그 여배우를 잊기로 다짐한다. 충분히 멀어지지 못했음에도, 관점을 결정짓는 게 과연 인간 눈인가 하며 말이다.
서록을 카메라 파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에게 난 새로운 카메라 한 대를 쥐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여배우와 다시 함께할 수 있다면.. 너라면 만약..'
"잡아볼래?"
'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걸 영화처럼 생각해.'
"카메라를 왼쪽 끝으로 움직일 때 저 여자를 오른쪽 끝으로 걷게 해."
서록에게 새 카메라를 쥐어주며 난. 창문 밖 지나가는 한 여자를 가리키면서.
"그럼 화면이 더 넓어지지. 사람들 눈은 극장에 있는 시간 내내 주인공만 따라 다니거든."
내가 가르친 것, 또는 그가 배워 언젠간 나타나게 될 장면들을. 그 여배우는 환한 조명을 받은 채 시선을 떠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