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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윤범 Oct 31. 2024

두 얼굴

2024 10 31


 그 말에는 껍질 속 씨앗이. 벗겨내고 또 벗겨내면 더 씹을 수 없는 게.  

 그 여자가 내 팔에 꽂은 주삿바늘에 난 잠이 들며, 그렇게 가슴 속 깊은 곳 재워둔 말들을 끄집어낼 지도 모르는 걸.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호텔 로비 한 편에 앉아 있던 라 부장이 뭔가를 본 듯 문 쪽을 향해 고개 돌렸으며 난 그 모습을 봤다. 유리 벽 너머를 보고 있는 라 부장이었다.

 그 걸음걸이마저 연기인 듯, 지금 당장 카메라를 갖다 대 조명을 비추면 영화 속 한 장면이 될 수 있을 것처럼. 호텔 앞 세워진 검은 자동차는 곧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그 여배우는 고개를 빳빳이 들었고 자기 그 모습을 프레임으로 옮긴 뒤 떠날 듯 이 세상 한가운데에 있듯, 그건 눈앞의 현실이었음을.

 내 앉은 자리로 걸어오는 그 여배우의 모습은.

 "만나 뵙게 돼 기쁩니다."

 그 눈은 까맣게 가려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자기 눈동자를 감춘 걸 벗은 뒤에야 그 눈을 보고. 그 여배우와 난 몇 분 동안 대화도 않고 커피잔만 만졌다. 식어 차가워지기 전에, 얼른 떠나려는 마음에 난 그런 말을 준비하고 말했다. 다음에 인연이 된다면 함께 일해보고 싶다고.

 꼭 대본을 읽듯 난.

 “실례합니다.”

 봉사원이 물을 가져왔지만 그 눈은 흔들리고 물잔을 내려놓는 손은 부들부들 떨린다. 그게 연기라면, 감독이라면 그는 그 상황에서 당장 컷을 외쳐야 할 테다.

 다른 자리에서 들려오는 중국인들의 대화 소리는, 그들 사이 무슨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지 난 알 수 없었지만.

 몇 년 전 랴오닝성의 당서기가 이곳을 다녀간 뒤 중국인 관광객의 수는 부쩍 늘었다고 하며. 그 소리들이 전해 들려오지 않았다. 장은호가 자리를 뜨자 여배우는 한쪽 다리를 꼬았고 한쪽 무릎이 뾰족해졌다.

 여배우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6층의 끝방으로 가고 난 따라 걷는다. 복도 한가운데에 멈춰 서지만 다시 문 앞으로 다가서고.

 문을 열었을 때 그 여배우는 다리를 꼰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다른 쪽 무릎이 뾰족해진다. 여배우가 말한다. 당신은 이미 경계를 넘어온 아니냐며.

 여성이라는 상대는 반대로 묻게 했기에. 그곳에서 여배우와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 투숙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다.

 당신이 감독인 영화에 있고 싶다는 말을. 두 얼굴이 겹쳐 보이며 난 초점을 잃고 만다. 그 여자가 한국인이었는지 조선인이었는지는 아직도 알 길 없지만. 카메라가 돌며 벽에 붙은 귀가 그 소리들을 기록한다.

 '당신 10대엔 어떤 일이 일어난 거예요?'

 이불 속 숨긴 그 가늘고 여린 팔을 만지자 내게.

 '왜 묻는 거죠?'

 남은 고통의 흔적을 느껴보고 싶었기에. 그러자 다시 내게.

 '그럼 당신은요?'

 반대로 쏘아붙이자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두 남녀는 지금 멈춘 시간 속에 있다. 난 주위를 볼 수 없고 먼 과거 앞으로 벌어질 일들마저 예측하지 못하게 된다.

 '이게 당신 영화인가요?'

 어느 순간 그 여자가 내게 그리 말하듯. 그러나 난 멈출 수 없음을. 남자라는 반대는 늘 투쟁해야 했다. 난 기계처럼 돌고 또 돌아 멈출 수 없다.  


 그 시계 안에 그 여자의 형상이. 그 인물을 꾸며낸 건 다름 아닌 나였으며. 영해, 그 여자는 깊고 푸른 물에 빠진 여자였다.

 그 물속으로 스며들듯 내려 앉는 내 모습이. 죄 지음고개 들지 못하고 곧 그 앞에 무릎 꿇을 난.

 그런 캐릭터를 또 한 번 구축할 자신은 없기에, 이곳에서 난 연기자인 듯하며 감독이 원한 연기만 남긴 채 떠날 듯, 미련 없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배우의 입을 통해 난 말하고는 했다.

 "깊은 우물에서 노래 부르면 살아남을지 몰라요. 슬픈 노래를 부르면요."

 영해를 연기한 건 이윤정이었다. 그 여배우를 처음 본 건 여객선이라는 제목의 TV 드라마에서였으며.

 10대의 나이에 교복모델로 얼굴을 알렸고, 그때 그 배우는 스쳐가듯 얼굴을 비추던 배우였지만 난 그 대사 한 걸 잊지 못했다. 그 입술의 모양 색깔마저 지울 수 없었다.

 "낭떠러지에 선 그 남자를 봤어요."

 그 드라마 한 편 때문에 배 타고 바다까지 건너 그 바위 위에서 그런 대사를 되뇌인 게. 그때 난 그랬다. 그날 거문도 날씨는 참 맑았다.

 이윤정을 다시 만났을 땐 더 자라 이미 큰 별이 돼 있었다. 한편으론 화려한 표정 뒤 맴도는 그 여자의 우울함을 목격했고. 그 여배우과 함께 했을 때 난 꿈을 이룬 것이었음을.

 이윤정은 사람들과 함께 밥 먹는 걸 좋아했다. 먼저 다가갈 사람은 몇 없었지만. 들판 위의 꽃처럼 늘 혼자였지만.

 "침대 위에 홀로 있지 마오."

 그 모습이 내게 그런 시상을 떠올리게 해 난 시인처럼 한 문장을 긋는다. 그 문장을 소리로 듣게 한다. 끝내 사람들이 보게 한다.

 등 뒤로 감춘 그 손은, 어디에도 기대서지 않은 채 말하던 그 여자가 다가간다. 그곳 앞에 서서 말한다. 낭떠러지가 보인다고. 그 대사를 그 입술로 움직여 말하게 했을 때 난 오른손을 불끈 쥐고 말았다.

 그 푸른 우울함은 어두운 빛을 받을 때 더 반짝였다. 그 여배우와 함께한 그때 날들이. 대한민국의 여배우, 그러나 한 줌 가루 되어 사라지고 떠난.

 그 여배우가 남긴 마지막 인물 영해는 많은 사람들 감수성을 자극하고야 만다. 이윤정 유작의 개봉 뒤 그 우울함은 이미 자신의 몸 전체로 퍼져나간 뒤였고, 스스로 목을 조여 숨을 끊은 그 순간까지 오게 됐을 때 난 처음 그 배우를 본 순간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사람들은 내게 이야기했지만, 그 여배우와의 마지막 작품에서의 남은 것들을 묻곤 했지만.

 그 목소리를 지울 수 없는 건, 여객선 위의 그 모습조차 물 아래 깊은 곳에서 잠망경을 통해 바라볼 모습 같기에.

 기억은 그렇게 눈 앞에서 멀어지고 또 사라진 뒤 추억이 된다. 그 여배우를 잊기로 다짐한다. 충분히 멀어지지 못했음에도, 관점을 결정짓는 게 과연 인간 눈인가 하며 말이다.

 서록을 카메라 파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에게 난 새로운 카메라 한 대를 쥐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여배우와 다시 함께할 수 있다면.. 너라면 만약..'

 "잡아볼래?"

 '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걸 영화처럼 생각해.'

 "카메라를 왼쪽 끝으로 움직일 때 저 여자를 오른쪽 끝으로 걷게 해."

 서록에게 새 카메라를 쥐어주며 난. 창문 밖 지나가는 한 여자를 가리키면서.

 "그럼 화면이 더 넓어지지. 사람들 눈은 극장에 있는 시간 내내 주인공만 따라 다니거든."

 내가 가르친 것, 또는 그가 배워 언젠간 나타나게 될 장면들을. 그 여배우는 환한 조명을 받은 채 시선을 떠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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