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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호 Mar 25. 2024

오늘 같지 않은 언제나

 이 여편네는 또 어딜 간 거야! 요즘 행동이 영 의심스러워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매일 밖으로 싸돌아다니는 탓에 얼굴을 보기도 어렵고 집안 꼴은 홀아비가 사는 것처럼 엉망진창이다. 빨래통에서는 쉰내가 진동하고 설거지는 싱크대 밖으로 넘쳐흐르는 중이다.


 분명 여러 번 경고를 했음에도 이 지경으로 방치한다는 것은 하늘 같은 남편을 무시하는 처사이기에 더 이상 묵인해서는 안된다. 집안의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아이들이 뭘 보고 배우겠느냐 말이다. 비록 이제는 장성하여 각자의 베필을 찾아서 나갔지만 그래도 틈틈이 찾아오는 녀석들을 볼 낯이 없다.


 며칠째 신고 있는 흰 양말은 더 이상 흰색이 아니며 축축하고 꼬질꼬질하여 남보기 부끄럽다. 게다가 이제 냉장고 속에 남아있는 음식이라곤 유통기한이 한참 전에 지난 우유와 말라비틀어진 사과 몇 개가 전부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른 화가 머리 뚜껑을 날려버리며 터져 나오기 직전이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서랍을 열어봤지만 라면 하나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입을 만한 옷가지를 대충 걸치고 집 밖을 나선다. 동네 친구들이라도 만나서 하소연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큰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째 집 주변이 조용하다. 평소 같으면 평상에서 장기판이 벌어지거나 마실 나온 녀석들이 보여야 하는데 눈에 띄는 사람이라곤 어린이들 몇몇과 편의점을 드나드는 뜨내기들 뿐이다.


 다들 어디 모여서 고스톱이라고 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전화를 돌려봤지만 받는 놈이 없다. 개중에 몇몇은 없는 번호라고 하니 그 또한 수상하고 의아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막걸리를 거하게 걸치고 말도 되지 않는 사소한 일로 티격태격했었는데 나를 빼고 단체로 여행이라도 갔나?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골목대장 노릇을 늙어서도 하고 있는 나를 제처 두고 몰래 어딜 갈 위인들이 아니다.


 먼저 전화하면 화부터 낼 것 같아 참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아내 번호를 찾아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는 가는데 응답이 없다. 두 번, 세 번, 네 번 연거푸 시도를 해봤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똑같은 대답만 돌아온다.


 젠장! 끈기 하나로 여태까지 버텨온 나다.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다시 전화를 걸자 이번에는 신호가 울리기도 전에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고함을 지르고 바로 끊어버린다.


 "그만 전화하라고 이 미친 노인네야! 씨발!"


 처음에는 내가 잘못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고 착각을 했으나 그럴 리가 없다. 무려 30년 넘게 '여편네'라고 저장되어 있는 그 이름을 확인하고 눌렀으니까 실수는 절대 아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에서 불현듯 든 생각은 '불륜'이었다.


 그럼 그렇지. 딴 놈이 생겨서 나를 이렇게 홀대하는 거였구먼. 애들만 다 자라면 나 버리고 간다고 했던 그 농담이 농담이 아니었어. 독한 여편네. 그것보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감히 너 따위가 나에게 이런다고?! 사지 멀쩡한 서방을 두고 딴살림을 차려? 그래 잘 됐다. 오늘 너 죽고 나 죽고 그 놈팽이도 다 죽었어.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어디 있는지 당장 말하라고. 결판을 내자고. 내 아내와 붙어먹은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고. 분명 읽기는 했는데 답장이 없다. 아는 욕이란 욕을 다 쏟아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눈에 보이는 쓰레기통이며 길가에 세워둔 간판을 걷어차고 다녔다.


 누가 신고라도 했는지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경찰차가 슬슬 다가오더니 경찰 두 명이 내린다.


 "어르신, 신분증 좀 보여주시죠."


 이런 이런, 어린놈의 새끼들이 내가 뭘 어쨌다고 눈을 부라리는 거지? 신분증 따위 없다고 하니 이름이라도 알려달란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여기 군수하고 동기동창이고 파출소장이 내 친한 친구 동생이라고. 어? 너 이름이 뭐야? 너네들 이러다 큰일 난다. 알았어?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서 '진짜' 범죄자들이나 잡으라고. 괜히 엄한 사람한테 이러다가 혼나지 말고."


 협박조에 가깝게 타일렀음에도 오히려 표정이 더 험악해진다. 그때 전화가 울린다. 아들이다. 서울에서 대기업 과장으로 일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니 나의 아들이다. 흐뭇한 표정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댔는데 다짜고짜 역정이 귀에 박힌다.


 "아버지! 또 사고 치고 다니세요?! 그러니까 요양소에 들어가시라니까요! 왜 돌아가신 엄마 전화번호로 또 전화하셨어요? 그 번호 이제 다른 사람이 쓴다니까요."


 "얘야, 그게 지금 무슨 말이니? 뭐가 어쩌고 어째?"


 "또 친구분들하고 시간 때운답시고 동네 어슬렁 거리고 계시죠? 그분들 다 자식네로 가셨거나 이미 저세상분이시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그러니까 왜 자꾸 고집을 부리세요. 이제 제발 그만하시라고요."


 머리가 아프다. 몸이 떨린다. 식은땀이 흐른다. 순간 세상이 휘청거리며 영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든다.


 경찰이 나를 부축하려는 것인지 체포하려는 것인지 내 양팔을 휘어 감는다. 이미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아버지. 저도 지쳤어요. 엄마도 계속 아빠 병시중만 들다가 돌아가시고. 저도 그 꼴로 살기는 싫으니까 앞으로는 알아서 하세요. 이만 끊습니다."


 아무리 떠올리려 노력해 봐도 아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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