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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회사이 Apr 06. 2023

이유 없는 고통, 의미 있는 고통

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5-2

사순절에 함께 읽는 욥기


1.        

“욥 어른은 아직도 의로우신 하나님을 비난하십니까? 하나님이 정의를 싫어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만은 왕을 보시고서 ‘너는 쓸모 없는 인간이다!’ 하실 수 있고, 높은 사람을 보시고서도 ‘너는 악하다!’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통치자의 편을 들지도 않으시고, 부자라고 하여, 가난한 사람보다 더 우대해 주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손수 이 사람들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34:17-19)


엘리후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십니다.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눈은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시며, 그의 발걸음을 낱낱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악한 일을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피하여 숨을 곳은 없습니다. 흑암 속에도 숨을 곳이 없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곳에도 숨을 곳은 없습니다.” (34:21-22)


맞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하소연이 하나님께 다다르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그분께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하여, 누가 감히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숨으신다고 하여, 누가 그분을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경건하지 못한 사람을 왕으로 삼아서 고집 센 민족과 백성을 다스리게 하신들, 누가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 (34:28-30)


사실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노릇이지만,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누가 창조주 하나님을 비난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악한 왕을 세워 고생한다고 하나님께 누가 항의할 수 있을까요? 


photo by noneunshinboo 


엘리후가 욥에게 대놓고 말합니다. 


“이제 욥 어른은 마땅히 받으셔야 할 형벌을 받고 계십니다. 심판과 벌을 면할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욥 어른은 뇌물을 바쳐서 용서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속전을 많이 바친다고 하여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재산이 많다고 하여 속죄받을 수 없고, 돈과 권력으로도 속죄를 받지 못합니다. . . 악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어른께서는 지금 고통을 겪고 계십니다마는, 이 고통이 어른을 악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줄 것입니다.” (36:17-21)


참 모질게, 못되게 말하는 엘리후입니다. 욥의 고통과 고난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받는 형벌이라는 것입니다. 욥, 당신은 하나님의 심판과 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니 그저 가만히 있어, 주어진 고통과 고난 속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청하라는 말입니다. 지금 겪는 이 고통이 욥이 더 이상 악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지켜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재판장입니다.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습니다. 

“욥, 당신은 악하다, 악했다, 죄인이다, 죄를 지었다, 벌을 달게 받아라. 선처를 구해라. 끝.” 




엘리후는 욥의 죄를 제대로 증명하지 못하고 실패한 친구들, 즉 무능한 검사들을 대신해서 욥의 죄를 증명하려 합니다. 그런데 엘리후도 그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합니다. 그가 내민 증거라면 ‘나는 무죄다’ 주장하는 욥의 그 변론이 유일한 증거입니다. 


“욥, 당신이 감히 하나님께 따졌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따지다니, 항의하다니, 게다가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겠다 했으니, 고소하겠다 했으니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죄인이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엘리후는 하나님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옳으시다, 틀림이 없으시다, 의로우시다, 정의로우시다’, 그러니 ‘네가 틀렸다, 네가 악한 일을 저질렀다, 네가 죄인이다’ 그것을 욥에게 증명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변호인입니다. 하나님이 재판장이신데, 그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엘리후가 변호하고 있습니다. 욥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을 방어하겠다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누가 재판장일까요? 


noneunshinboo 


아픔과 슬픔 속에 있는 가족과 친구와 이웃의 이런 질문에 당황합니다. 


“도대체, 왜 선한 사람에게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나는 거야? 그게 옳아? 하나님이 정말 계시긴 한 거야? 무슨 하나님이 그래?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왜 저런 불쌍한 사람, 너무 착하고 선한 사람에게, 도무지 악이라고는 죄라고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저렇게 하실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하나님을 방어하려고, 변호하려고 우리는 애를 씁니다.  


“하나님께는 우리가 모르는 뜻이 있다. . . 지금은 우리는 알 수 없다. . . 그러나 우리 사람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 . 다 그 이유가 있어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 . 우리는 죄인이다. . . 우리의 잘못이다. . . 그래서 . . .”


내가 하나님의 대변자라도 되는 듯, 하나님을 잘 안다는 듯,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안다는 듯, 마치 정치 평론가라도 된 듯, 성경 학자라도 된 듯, 세상 모든 일에 도가 튼 듯, 신앙의 고수라도 되는 듯, 서슴없이 하나님을 변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린 모두 오십 보 백 보의 엘리후입니다. 그 일어난 고통과 고난을 내가 설명하려고 하고, 그 이유를 내가 찾아내려고 하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이런 뜻이 있지 않으실까 . . . 때론 머뭇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확신 속에 꼿꼿합니다. 그것이 나의 굳은 믿음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내가 다 알 수 없는, 아니 내가 아는 것이 너무 적은, 내가 잘 모르는 그 하나님을 내가 변호하고 방어하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너무 작고 좁은 나의 신앙, 신학, 신념을 방어하고 변호하려고 애를 쓸 뿐입니다. 내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니 너는 틀렸다, 너는 잘못했다, 너는 죄인이다 . . . 그렇게 나의 신학을 주장하고, 나의 신앙을 변호하고, 나의 신념을 방어합니다. 


2.        

다시 영화 <뷰티풀 마인드>입니다. 내가 최고여야 한다, 강박에 시달리던 존 내쉬는 그만 조현병에 걸립니다. 낯선 사람이 찾아오고, 감시하고 . . . 그래서 도망치고 숨고 . . . 때론 대화도 나누고 . . . 그러나 그 사람들은 존 내쉬에게만 보입니다. 결국 그는 정신병동에 입원해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습니다. 그러다 그는 그 곳을 나옵니다. 완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깥을 선택합니다. 


그는 힘겹게 자신의 병을 받아들입니다. 내가 조현병 환자라는 것을 인식합니다. 지금 나를 찾아오는 이 사람들은 오직 내 눈에만 보이는, 내가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진짜가 아니다, 현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과 이별을 고합니다. 더 이상 당신들과 대화를 하지 않겠다, 봐도 못 본 척, 찾아와도 모르는 척하겠다. 그들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조금씩 존 내쉬는 현실 속으로 돌아옵니다.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진짜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노벨 경제학상을 받습니다. 그가 수상식장에서 한 수상 연설입니다. 


“전 언제나 숫자를 믿어왔습니다. 추론을 이끌어내는 방정식과 논리를 말이죠. 그러나 평생 그걸 연구했지만, 저는 묻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논리입니까? 누가 이성을 결정하는 거죠? 저는 그동안 물질적 세계와 형이상학적 세계, 비현실 세계에 빠졌다가 이렇게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객석에 앉아있던 아내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갑니다. 


“전 소중한 것을 발견했어요. 그건 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발견입니다. 어떤 논리나 이성도 풀 수 없는 사랑의 신비한 방정식을 말입니다. 난 당신 덕분에 이 자리에 섰어요. 당신은 내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내 모든 이유는 당신이오.” 


photo by noneunshinboo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신비한 방정식이 그를 다시 현실로 끌어내렸습니다. 숫자와 방정식과 논리와 이성으로 이유를 찾으려 했고, 의미를 알아내려 했지만. 그러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랑이 이유였습니다. 고통 속의 존 내쉬 곁에 있던 아내가 그 이유였습니다. 사랑이 그가 일어설 의미, 살아야 할 의미가 되었습니다. 

존 내쉬의 고통은 물론 조현병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조현병의 원인과 이유를 찾고 또 찾아도 사실 거기에 마땅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가 그 병에 걸려야 할 그 마땅한 이유는 없습니다. 결국 이유 없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고통에 의미가 생겼습니다. 아내의 사랑입니다. 


고통이 그냥 고통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고통을 통해 내가 어떤 의미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유 없는 고통에 의미가 생깁니다. 사랑입니다. 사람입니다. 사랑의 사람입니다. 사람의 사랑입니다. 




3.        

우리에게 사람으로, 사람으로, 사랑의 사람으로 오신 사랑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우리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그 사랑의 고통과 고난이 바로 고통과 고난 속 우리가 찾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고난이 그냥 고통이 아니고 그냥 고난이 아닌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 그 의미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이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보이신 그 사랑은 우리가 여기 이 땅을 사는 의미입니다. 고통과 고난이 있어도, 여기를 하나님 나라로 사는 것이 바로 그 고통과 고난 속에 있는 우리의 삶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과 고난을 그냥 아프기만 아프고, 슬프기만 슬프고, 어떻게든 피하고만 싶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치고만 싶고, 하지만 그게 되질 않으니 그저 죽고만 싶은 고통과 고난. 그러나 우리가 차마 거기서 멈출 수 없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하나님 나라, 그 희망을 잡고 사는 한, 그것이 나의 삶의 의미, 내 존재의 의미인 한에는 우리는 여기를 하나님 나라로 살아갑니다.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질 그날을 기다리며, 아프고 슬프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희망을 걷습니다.  


→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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