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 어둠 속을 걷는 법 5-3
사순절에 함께 읽는 욥기
1.
“주님의 종을 너그럽게 대해 주십시오. . . 내 눈을 열어 주십시오. . . 나는 땅 위를 잠시 동안 떠도는 나그네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나에게서 감추지 마십시오. . .” (시편 119:17-19)
우리는 하나님의 집을 향해 걷는 순례자입니다. 우리는 이 땅 위를 잠시 동안 떠도는 나그네입니다. 그 길 위에는 비도 내리고 눈도 옵니다. 비도 맞고 눈도 맞습니다. 따뜻하고 포근한 바람, 땀을 식히는 시원한 바람, 꽃 향기가 묻어난 바람만 있으면 좋겠는데. 너무 뜨겁지 않은 해이면 좋겠는데. 그러나 내리는 비와 오는 눈을 우리가 피할 수는 없습니다.
“. . .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마태복음서 5:45)
불의하고, 죄와 악을 가까이하고, 하나님을 아랑곳 않는 농부에게만 비가 그쳐 석 달 열흘 가뭄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압니다.
정직하고 흠이 없고 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농부에게만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잘 압니다.
“왜 나에게 해는 떠오르지 않고, 게다가 달도 구름에 가려 있습니까? 왜 나에게 그러십니까? 왜 나에게만 이렇게 하십니까?”
그런데 막상 나에게 닥친 고통과 고난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엘리후는 지금 하나님께 항의하는 욥에게 화가 났습니다. 욥의 친구들에게도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이 틀렸을까 싶어 그게 화가 납니다. 그래서 욥이 죄인이어야 합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욥이 지금 벌을 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믿는 하나님께 화가 덜 날 것 같고, 그래야 그 하나님을 앞으로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나에게는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2.
욥만 지금 잿더미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거기 세 친구들도, 그리고 느닷없이 나타난 엘리후도 그 위에 함께 앉아 있는 신세입니다. 왜 욥이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지, 왜 선한 사람들이 이런 고통과 고난을 겪고 있는지, 그 정확한 이유, 그 설명과 답을 하나님께로부터 듣지 못한 것은 다 똑같습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게 보여도, 지금 욥과 친구들, 그리고 엘리후 모두 그 내면, 그 영혼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모두가 새 힘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가던 길 멈추지도 않고, 그릇된 길로도 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셔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답을 듣고 싶다.” (31:35)
욥과 함께 입을 그만 다물고 말을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그 말씀을 기다려야 합니다.
“내가 찾아낸 증거가 아니라, 내가 들은 증거가 아니라, 내가 유추해낸 증거가 아니라, 내 머리와 논리와 확신으로 생각해낸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 들려주신 것에, 말씀하신 것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내 마음이 이것저것 다 취하겠다, 다 먹겠다, 다 갖겠다, 탐욕으로 치닫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내 눈이 하나님이 아닌 헛된 것을 보지 않게 해주십시오. 헛된 것을 쫓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어렵지만 불편하고 힘들지만 그 주님의 길을 활기차게 걷게 해주십시오.” (참고, 시편 119:33-37)
나를 그리고 우리를 찾아온 모든 고통과 고난이 기도 속에 아예 없어지면 좋겠지만, 그럴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누가 물을 퍼붓는 듯 쏟아지던 비가 갑자기 내 머리 위에서만 멈추지는 않는다는 것, 갑자기 나에게만 해가 뜨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우리는 나에게 닥친 고통과 고난을 보는 나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3.
여기 고통과 고난 속에 있는 우리의 기도와 고백입니다.
“내가 주님의 계명을 따르니, 올바른 통찰력과 지식을 주십시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잘못된 길을 걸었으나,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선하신 주님, 너그러우신 주님, 주님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쳐 주십시오. . .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친히 일러주신 그 법이, 천만 금은보다 더 귀합니다. 주님께서 손으로 몸소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세우셨으니, 주님의 계명을 배울 수 있는 총명도 주십시오. 내가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기에,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면, 기뻐할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판단이 옳은 줄을, 나는 압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고난을 주신 것도, 주님께서 진실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주님의 종에게 약속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베풀어 주셔서, 나를 위로해 주십시오. 주님의 법이 나의 기쁨이니, 주님의 긍휼을 나에게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새 힘을 얻어 살 것입니다. . .” (시편 119:66-77)
그리고 여기 고난과 고통의 터널을 지난 후의 우리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법을 내 기쁨으로 삼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법도로 나를 살려주셨으니, 나는 영원토록 그 법도를 잊지 않겠습니다. 나는 주님의 것이니,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 . 악인들은, 내가 망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나는 주님의 교훈만을 깊이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아무리 완전한 것이라도, 모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계명은 완전합니다. . .” (시편 119:92-96)
4.
“아프냐? 아프지 마라. 니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오래 전에 TV 드라마에서 나왔던 극중 어느 배우의 대사입니다.
비록 그 이유는 알 수 없어도, 그 의미가 있어야 우리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기 내가 아픈 이유가 있습니다. 의미가 있는 아픔이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프니 내가 아픕니다. 그래서 나의 아픔은 의미 있는 아픔입니다. 내가 하는 사랑이,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나에게 너무 큰 의미입니다. ‘사랑’으로, 사랑하는 ‘너’로 인하여 나에게 그냥 아픔이 아닌 ‘의미 있는’ 아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픈 나는 아프기만 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나에게 그냥 고통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의미 있는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픈 것을 보고 내가 이렇게 아프니, 예전에 내가 몰랐던 사랑, 그 사랑에 대해 내가 깨닫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정말 사랑하고 있었구나, 내가 몰랐구나, 이게 사랑이구나.
고통이 그냥 고통이기만 하지 않는, 그래서 의미 있는 고통이 되는 것. 그 사랑으로 내가 아프고, 그 사랑으로 내가 슬프고, 그래서 그 사랑으로 나는 그 사람의 고통 속에 함께 있습니다. 이것이 고통의 의미입니다.
“내가 아픈데, 너도 아프구나. 찔린 것은 나인데, 너도 아프구나. 지금 내 고통 속에 너도 있구나. 너의 고통의 이유는 나이구나. 나의 고통이 적어지는 이유는 너였구나. 내가 너에게 그런 의미이구나.”
그리고 지금 아픈 그 사람 역시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나 혼자 겪는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그 사람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역시 그 고통을 통해 나를 그리고 나의 사랑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고통 속에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아래의 우리의 관계입니다.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를 함께 진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아픔 속에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또한 부활을 함께 맞는 관계, 서로의 기쁨 속에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형제 자매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이름 아래 모인 이유입니다. 우리 모두가 때때로 겪는 그 이유 없는 고난과 고통의 이유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의미 있는 고통이고 고난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이들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을 주님께서 모두 아시오니, . . . 주님, 우리의 부르짖음이 주님 앞에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주옵소서. 우리의 기도와 애원이 주님께 이르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우리를 건져 주옵소서. . . 우리가 주님의 법도를 택하였으니, 주님께서 손수 우리를 돕는 분이 되어 주옵소서. . . 우리를 길을 잃은 양처럼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오시어 주님의 종을 찾아 주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계명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아멘.” (시편 119:168-170, 173-1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