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쓴소리

아무튼 영어 7

by 김삼일

고2때 비트가 개봉을 했다. 정우성의 우수에 찬 눈빛과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질주하는 모습들을 바탕으로 영화는 크게 흥행했다. 개인적으로는 고소영의 고등학교 시절이 인상깊었다. 전교1등인 로미(고소영)는 죽자사자 공부하면서도 쿨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정우성을 고용한다. 정우성이 야구를 보고 그 이야기를 해주면 마치 자기가 본 양 친구들 앞에서 주말에 본 야구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여기서 그녀가 얻게 되는 건 무엇일까?


나도 그랬다. 열심히 공부해놓고도 공부 열심히 안한척 했다. 정우성을 고용하진 못했지만 시험 당일엔 어제 내가 얼만큼 잤는지, 얼만큼 공부를 안했는지 이야기했다. ‘나 열심히 했어’, ‘자신있어’ 라는 말은 해본적이 없는 것 같다. (고소영과 다른 점은 전교 1등이 아니었다는 점과 아무도 내가 뭘했는지에 관심없었다는 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행동(열심히 안한 점만 늘어놓는 행동)을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깔려있는 것 같다. 첫번째는 ‘바보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 이다. 열심히 해놓고 성과가 좋지 않으면 바보처럼 보인다. 나는 바보 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열심히 안 한 사람이 되는 편을 택한다. 두번째는 ‘열심히’의 정의가 모호하다. 얼만큼 해야 열심히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시험 전날 5시간 잤다면 열심히 하는 걸까. 시험결과가 100점 나오면 열심히 한 걸까. ‘열심히’ 했다라는 말을 잘 모르니 열심히 안하는 편을 택한다.


대학교 3학년 무렵부터 들었덛 전공과목 중 ‘실용영어’라는 과목이 있었다. 외국인 교수님 2분의 강의과목으로 실용영어 1.2.3까지는 전공필수과목이고, 실용영어 4,5,6은 전공선택과목이었다. 수업은 당연히 모두 영어로 진행되고, 압도적인 과제량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수업을 듣고나면 압도적인 과제를 해낸 만큼 올라간 실력을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필수적으로 들어야만하는 1,2,3까지만 들었는데, 4,5,6코스까지 듣는 존경스러운 친구들도 있었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영어에세이를 써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잘 쓴 에세이 몇 편은 교수님이 친히 이름을 불러가며 칭찬을 해주셨다. 나는 그 명단에 오른 친구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기만 했다.


하루는 친구의 하숙방에서 노닥거리다 나의 과제를 읽어달라고 했다. 나름 열심히 했고 뿌듯했던 글이라 칭찬받고 싶은 은근한 마음에 읽어봐달라고 한 것이었다. 내 친구는 없는 말은 못하는 친구였다. 글을 읽고는 단번에 ‘잘썼는데 너는 이거보다 더 잘 쓸수 있지 않니?’ 라고 말했다.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친구의 말이 기분 나빴던게 아니라 정말로 나는 딱 그만큼의 말을 들을 만큼만 했기 때문이다. 완성이 목표이지, 잘쓰겠다는 목표는 없는 글. 깨어있지 않은 글. 대부분의 과제가 그랬다. 제출이 목표이지 더 잘하려는 한 스푼의 노력이 부족했다.


6시 마감이었는데 4시경 하숙방에서 나와 컴퓨터실로 갔다. 어떻게 하면 더 잘할지를 2시간동안 고민하고 고쳐쓰는 과정을 반복했다. 만족할 만한 글이 나왔다. 과제 돌려받는 시간에 잘한 글 중 내 이름이 처음으로 나왔다. 설령 내 이름을 교수님이 불러주지 않았더라도 만족스러웠을 것 같다. 맹한 국물에 소금 한 스푼을 넣어 국물 맛을 살려낸 그 느낌을 잊을 수 없었으니까.


아직도 대부분의 삶은 술에 물탄 듯 물에 술탄 듯 살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쳇바퀴 도는 삶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기억하고 있다. 내가 열심히 살았던 순간들. 개인적으로 고3시절과 임용고사 재수하던 시절 내가 생각해도 열심히 살았다. 하나의 목표에 집중했고, 깨어있었다. 결과 여부와 상관없이 이 시절은 나의 자존감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이 경험으로 나는 내가 마음먹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요즘 즐겨보는 프로그램으로 아무튼 출근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다양한 직종들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즐겁다. 무엇보다 ‘열정’이라는 촌스럽지만 빛나는 단어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나왔다. 설레였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마음 뛰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나를 돌보고 아끼느라 쉬어왔던 템포들을 반박자만 더 빨리 하고픈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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