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는 방법
우즈홍 지음, 이에스더 역
별점: 4.5
모두에게 이렇게 높은 별점을 받을 책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을 읽던 내겐 너무도 필요했고 많은 깨달음을 주었던 책.
사람은 살면서 끊임없이 여러 가지 도전과 전복을 경험한다. 감정의 진폭이나 사상이나 이념이 바뀌기도 한다. 다른 노선의 길을 가다가 돌아올 수도 있고 자신이 선택한 길만 묵묵히 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의 실제 과정이자 한 사람의 영혼이 끊임없이 단련되는 과정이다.
이 책을 읽으며, 이 시기를 겪으며 나라는 사람을 많이 돌아볼 수 있었다.
나의 기본값은 ‘그럴 수 있지’와 ‘굳이’였던 것 같다. 이 둘이 만나니 겉으로 큰 밀물도 썰물도 없다. 근데 또 보기보단 예민해서 눈치도 많이 보고 속에선 온갖 소용돌이가 친다. 그러면서 이 ‘그럴 수 있지’라는 놈이 나에겐 별로 적용되지 않는다. 항상 부족하고 더 하지 못했음에 자책한다. 굉장히 피곤한 스타일이라 하겠다.
그래도 이런 상태로 나름 잘 살 수 있었던 건 나는 좋은 사람이고 점점 발전하는 사람이라는 나름 대로의 높은 자존(?)과 ‘하면 잘하는데 안 하는 거야’라는 자기 합리화 덕분이었던 것도 같다. 애초에 못하는 것에 크게 욕심을 갖지 않을뿐더러 잘한다의 기준이 높지 않다. 최고가 되어야겠다거나 남보다 더 잘해야 한다는 욕심도 별로 없다. '못할 수도 있지 꼭 다 잘해야 하나?' 돈도 많이 벌고 싶지만 어마어마한 부자까지는 필요 없고, 우리 가족 걱정 없이 살 정도의 경제적 여유와 가까운 주변 사람이 힘들 때 도와줄 수 있는 정도의 여유면 된다.(물론 이것도 절대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도울 수 있으면 좋겠으나 얼굴도 모르는 남의 평화는 사실 내게 큰 관심사는 아니다.
더 어렸을 때는 하루에 10시간 넘게 게임에 빠져 살던 시절도, 한 달에 30일은 술을 먹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머리 빡빡 밀고 속세(?)의 모든 연을 끊고 공부만 하던 때도, 보이는 버스 잡아타고 아무 데나 흘러가거나, 다 경험이라며 일부러 먼 길을 돌아돌아 다니던 때도 있었다. 한때는 소설만 읽다가 한때는 자기 계발 서적만 찾아 읽고, 낭만 찾아 전공은 다 버리고 교양만 듣기도, 친구 따라 사업한다고 막무가내로 휴학도 했었다. 엄청난 걸 하진 않았지만 내 한도가 허락하는 선에서 참 이것저것 꽂히면 열심히는 했던 것 같다.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나쁨'을 대면해야 한다.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다 이제 사치는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현실을 마주하고 그 결핍에 잡아먹혔을 때, 그때부터 미래의 행복이라는 허상을 찾아 현실의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사치를 버리는 것. 취미, 휴식, 여유. 버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렇게 조금씩 병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를 사랑하는 법을 잊어갔다.
지금은 많이 미화된 지옥 같은 나날들을 지나 어느 정도의 목표를 이루고 많이 안정을 찾은 이후에도 강박과 불안은 계속 따라다녔다. 여전히 여유도 없고 어떻게 쉬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이미 너무 익숙해져 버린 병은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았다. 점점 한계에 다다르는지도 모르고.
작년부터 얼마 전까지 참 힘든 시간을 보냈다.
평생 짊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십자가를 묻어줄 수 있었지만 갑작스러웠고 어느 때보다 무거웠으며 그 과정은 너무도 길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해 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그걸 받아들이는 방법도 그에 대한 대처도 너무 서툴렀을 때, 그 후회와 미련을 하나씩 마주하며 계속해서 내 한계를 넘었을 때, 너무나도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옳다고 믿었던 나의 병든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그 파편들을 뿌리면서.
무언가로 좌절하게 되었을 때도 자신에게서 원인은 찾되 집착하거나 정도를 지나쳐서는 좋지 않다. 자신의 잘못이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스스로 위로하고 다른 사람의 지지를 요청하면 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슬픔이나 좌절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어야 한다. 더불어 무엇이 원인이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객관적 시선으로 외부의 문제점도 함께 찾는다면 자기 위로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
지금 여유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내일도 여유를 가질 수 없다.
꼭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내일의 행복을 오늘의 행복으로 살 수 없다.
이제는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지금을 즐길 수 있다.
지금 내게 만족한다. 내 믿음 그대로 10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나는 모든 면에서 발전했다. 아주 많이.
10년 뒤의 나는 오늘보다 행복할 것이다. 아주 많이.
내가 참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적고 보니 그냥 원래의 나를 찾아가고 있는 거였구나.
사람은 살면서 끊임없이 여러 가지 도전과 전복을 경험한다. 감정의 진폭이나 사상이나 이념이 바뀌기도 한다. 다른 노선의 길을 가다가 돌아올 수도 있고 자신이 선택한 길만 묵묵히 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의 실제 과정이자 한 사람의 영혼이 끊임없이 단련되는 과정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심리적 고통은 모두 그 속에 '의미'가 있다. 그 고통을 줄이거나 피할 방법은 수없이 많지만,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고통을 직면하고, 고통의 의미를 인식하며, 문제의 근원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누구든지 생각과 행동에는 빈틈이 생긴다. 활동이 많고 폭이 넓을수록 빈틈도 많아진다. 반대로 어떤 활동이나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빈틈이 없다. 활동 자체를 거부하고 움직이지 않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바라는 것들이 긍정적으로 지연되는 상황에서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기회를 준다. 실력, 능력, 환경 등 자기가 도전하는 위치나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한다. 그러니 조급한 마음으로 전전긍긍할 필요 없다. 내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면 단단히 마음먹자.
안타깝게도 분명 어느 시점에서는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정을 격화해서는 안 된다. 외부 세계의 가해자가 초래한 일이라고 치부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직면한 어려움을 받아들이면 분출되는 나의 에너지가 현실을 바꿀 수 있다. 내면에서 흐르는 자기 에너지를 느껴보고 그 흐름을 타보자. 나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는 길이다!
개인의 성숙함을 판단하는 지표는 자신의 '나쁨'을 어느 정도 직면하느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자기 내면의 원시적 부정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언제나 옳고 바른 사람이라는 강한 내적 요구의 작용으로 자신에게 나쁜 면, 연약한 면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편집적 사고가 나타난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옳으니 다른 사람이 모두 자기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성숙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나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변화를 꾀할 때 무르익는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면 주위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쁨'을 남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나쁨'을 대면해야 한다. 의연하게 받아들이고 이에 대처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리 모두 어느 한구석에는 '나쁨'이 존재한다. 더불어 서로의 '나쁨'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랑'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약함이나 나쁨을 솔직히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면 상대도 이를 고려하고 배려한다는 말이다. 자기 마음을 학대하지 말자. 내면의 나쁨이 주도하더라도 경계와 주관을 바로 세워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먼저 '자신을 돌보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사람은 '표출'과 '접촉'을 통해 마음이 단련된다. 나이가 어린 데도 행동이 어른스럽고 겸손하다면 이는 자기 에너지를 포장한 결과이다. 표출과 접촉에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고 상대에게 맞추거나 좋은 방향으로 행동과 마음을 유도한 것이다. 이런 성숙은 모두 가짜 성숙이다. 오롯이 자기 삶을 충분히 펼쳐 나가야 한다. 다채롭게 사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너그러워질 수 있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애와 자기만족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신이 부정당해본 경험이 있거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런 요구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 결과 결국 자기 존재를 잃어버리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 성공과 인정으로 포장된 '완벽한' 길을 선택하려 한다면 그는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 실패와 좌절, 따가운 시선과 경쟁이 장애물로 포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는 사람은 계속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순결하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주도적으로 선택하지 않는 사람의 삶에는 공허함이 찾아든다.
우리는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늘 대답하기 어려워한다. 그만큼 자기 에너지원을 충분히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생명력을 키워줄 감각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수 없다. 만약 감정이 아니라 머리로 답을 찾는다면 머릿속은 더 복잡해진다. 주저하고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데 재능이나 능력을 타진하며 가능과 불가능의 여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한다. 감각대로 살아가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들어야 "내가 원하는 게 이거야!"라고 명쾌하게 답 할 수 있다. 현재 절대 불가능한 영역이라도 망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피해자의 고통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아주어야 한다. 섣부른 위로는 안 된다. 반대편을 옹호하듯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건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닐 거야.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지."라는 말은 절대 삼가야 한다.
우리는 모두 진짜 자신을 드러내기 두려워한다. 진짜의 나(자신)를 보호하기 위해 가짜 나(이성)로 산다. 그래야 세상에서 상처받거나 실의에 빠지더라도 진짜 '나'가 아니어서 안도할 수 있다.
생각이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면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이다. 자기 존재감이 흔들리지 않도록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자신을 방어한다. 책을 읽는 이 순간도 생각으로 평온해질 수 없다면 자신에게 물어보자.
'지금 무엇을 방어하고 있는가?'
자기 생각과 감정을 통제하자.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적절한 시간 안에 효율적으로 처리하도록 정리해야 한다. 물론 중대한 일에 침몰당하거나 장악당할 때도 있다. 하지만 강한 심리적 압박에도 매일 30분 정도는 편안하게 누군가를 만나거나 쉬어 보자. 중대한 일일수록 완전히 점령당하지 않고, 문제나 고민도 생활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여유가 깃든다. 거리를 두고 생각해 보거나 자유롭고 분리된 시간을 가져야 지혜도 발휘될 수 있다.
무언가로 좌절하게 되었을 때도 자신에게서 원인은 찾되 집착하거나 정도를 지나쳐서는 좋지 않다. 자신의 잘못이나 문제점에 대해서는 스스로 위로하고 다른 사람의 지지를 요청하면 된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슬픔이나 좌절은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어야 한다. 더불어 무엇이 원인이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객관적 시선으로 외부의 문제점도 함께 찾는다면 자기 위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어른이든 아이든 자기감정을 온전히 표출할 때 살아 있다는 존재감을 느낀다. 자기감정을 중심으로 자아를 구축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는 사람이 높은 EQ를 갖는다. 비교적 완벽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 되는 것이다.
"본능을 잃으면 많은 것을 잃는 것이고, 야성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너무 철이 들고, 교양이 생기면 문명의 틀 안에서 자신의 몸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이때 큰 결함이 발생하는데 진짜 자기와 끊어진 몸은 생명의 동력인 '자기애, 성, 공격성'이 훼손된 채 행동할 수 있다.
머리가 만들어낸 '나'는 '~을 해야 한다'라고 다짐하지 마라. 이 개념으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면 거짓된 세계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쉽게 짜증 낸다. 현실의 자극이 자신의 이성적 범위에서 벗어나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만큼 미성숙하다는 증거이다.
자신을 향한 사랑과 존재감이 부족하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예민해진다. 존재감의 최초 근원은 '사랑'이다. 따라서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한다. 가짜 자아가 아무리 완벽해도 존재감으로 치환될 수는 없다. 가짜 자아로 관계를 맺는 사람은 자신도 가짜이고, 자신이 만든 관계도 가짜라고 생각해 관계를 파괴하려 든다.
관계에서 나와 너는 서로의 거울이 되어 준다. 나는 너에게 비친 내가 좋은 사람이길 바란다. 상대의 비위를 맞추거나 성, 권력, 의존의 방식으로 너를 유혹하는 이유다.
'목표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자신의 모든 시간을 목표로 가득 채우며 끊임없이 목표 수립과 달성 사이에서 고통받는 증상이다. 이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적대 세력이 자신의 목표를 공격한다고 걱정한다. 핵심 자아가 없기에 '내가 세운 목표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목표이다. 목표를 공격하는 적대 세력의 근원은 나의 적이고, 반드시 그들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목표가 정해지면 반드시 달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아가 죽는 것이라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언제나 근심에 가득 차 있다. 목표가 흔들리거나 세워지지 않으면 그들은 근심에 쌓인다.
언제나 자신에게 '최고'를 원한다면 아직 진정한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자신에게 적합한 정도를 찾아야 비로소 '나'에게 만족할 수 있다.
이제는 외부 세계나 다른 사람의 감정에 치우치지 말자. 자기감정을 존중하라. 감정은 마음에서 나온다. 자기감정을 따르면 오히려 자유로워진다.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한다. 알고자 하는 만큼 자신의 고통스러운 부분을 건드려야 한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고통이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