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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욕망은 누구의 것인가요.

단어사전 편

by 안 희 Dec 2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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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배움의 길에서 생긴 버릇이 있다. 얼핏 아는 단어라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전을 뒤적이는 것인데 조금만 해봐도 대충 알고 있던 단어가 꽤 많다는 걸 발견하게 되며 새로운 단어도 줄줄이 알게 되는 재미도 얻게 된다. 처음 이 습관이 생긴 건 작가의 '선택'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대사 속에 잠긴 명사와 동사, 어미와 어투, 지문 속 형용사들은 전부 단서가 될 수 있으므로 대충 안다고 넘겨버리거나 주관적인 해석으로 판단해 버리면 의도를 벗어나는 연기가 탄생되므로 필수로 해야 하는 작업 중 하나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대충 아는 것을 무심하게 넘기는 게 어려워졌다. 비슷한 모양의 단어들이 짝지어 나오면 분명한 차이를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집요함이 생겨버린 것이다. 예를 들면, '욕망'과 '욕구'의 차이 뭐 이런 거다. 


욕구는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결핍된 상태를 채워서 해결하려는 심리이고, 욕망은 자기가 스스로 의식적으로 부족을 느껴서 탐하는 것이므로 욕구 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또 다른 호기심에 불이 들어온다. 나의 일상에서 욕구와 욕망을 찾고 대본 속에서 욕망과 욕구 중, 무엇을 찾을까 고민한다. 이 모든 건 알고 싶은 욕구에 의해 작동되는 것일까 더 잘하고 싶은 욕망에 의해 작동되는 것일까. 







내 ‘꿈’은 배우가 아니었다. 어릴 적 나에게는 ‘장래희망’이라는 게 딱히 없었다. 나는 그저 무대를 좋아했다. 추측컨대 5살 때부터 갈망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 증거는 이상하게 촌스럽지 않은 초록색 투피스를 입고 유치원 행사의 mc를 보는 모습과 콩콩 뛰어다니는 수준의 무용처럼 보이는 발레 공연을 하는 모습이 담긴 사진앨범 속에 있는 볼이 통통한 어린아이의 표정에서 드러났다. 그 당시에는 눈높이학습지와 특기학원들이 호황기었다. 나는 오빠를 따라다니게 된 피아노 학원에서 의외의 재능을 발견했다. 영재까지는 아니었어도 여럿 콩쿠르대회에 나가 수상을 할 정도는 됐다. 예쁜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서 박수를 받고 트로피를 받던 장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무대를 나가기 전 들리던 심장소리와 첫음을 치기 전 눈을 감던 순간은 여전히 선명하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소녀가 된 아이는 자신의 몸 보다 훨씬 큰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아름답게 여겼다. 작은 손으로 건반 위를 활보하면 좁은 방 안이 맑고 고운 소리들로 채워졌고 음률과 나, 둘 만 남으며 모든 게 살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피아노를 쳤고 될 때까지 연습을 했다. 시키지 않아도 피아노와 함께하는 어린아이에게 선생님은 마음껏 피아노를 쓰도록 방 하나를 내어주셨고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갔다. 건반과 손가락이 닿을 때의 촉감과 건반이 눌릴 때의 압력의 감각이 생생할 만큼 피아노는 소녀의 친구였고 사랑의 대상이었다. 


예술과 빠진 첫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절대적인 지지자가 집을 나갔고 안정적인 직장인이 되길 바란 아빠는 피아노를 취미 이상으로 배우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런 힘이 없던 10살 소녀는 원장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세상은 나에게서 엄마와 피아노를 동시에 가져갔다. 소극적인 소녀의 체온은 더 내려갔다. 아빠에게 적대감을 느꼈고 침묵과 애교 없음으로 반항을 시작했다. 혼자서 참전한 전쟁을 선포했다. 학교 정문에서 나오면 피아노 학원을 지나쳐야 했기에 후문으로 나가 돌아갈 만큼 상심은 깊었다. 순수했기에 육체는 감정에게 솔직했고 순응적이게 상처를 끌어안았다. 소녀는 더 투명하게 희로애락을 느꼈다. 단지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할 뿐이었다.


상심에 젖은 줄리엣이 된 소녀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해 준 건 1998년 세상에 나타난 네 명의 요정, '핑클' 언니들이었다. 비를 맞아도 아름다운 그녀들을, 계단에 앉아 아련함으로 노래를 하는 그녀들을 처음 본 날을 잊을 수 없다. 이후로 소녀의 인생에는 그녀들이 전부가 되었다. 돌려보기가 없던 시절 용돈을 모아 비디오테이프를 구입해 언니들의 무대를 정성스럽게 보관했다. 활동을 마치고 휴식기에 들어가면 다음 앨범이 나올 때까지 필름이 늘어질 때까지 돌려봤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안무가 눈에 들어왔고 어디서부터 시작이 된 건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느새 나는 모든 안무를 다 외울 만큼의 춤꾼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일에 무척 진지했다. 시키지 않아도 안무를 외웠다. 춤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녀들이 되는 게 좋았다. 효리언니가 되고 유리언니도 되며 나중에는 보아도 됐고 베이비복스가 되기도 했다. 테이프를 돌려 끼우기만 하면 그 즉시 무엇이 될 수 있는 마법 같은 일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노래가 시작되면 눈빛이 변했고 무대가 실제로 느껴졌다. 멤버들이 옆에 있는 것 같았고 팬들의 함성소리가 들렸다. 4분 동안 난 진짜 '핑클'이 됐고 그녀들과 함께였다. 밥도 먹지 않고 춤만 췄다. 조명과 카메라가 없이도 무대를 만들어냈고 어떤 옷을 입고도 가능했다. 방과 후 학원대신 전축을 켰다. 무대는 무한적으로 재생됐고 영원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그녀들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음악을 멈추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으로 지내던 소녀는 학예회 시즌이 되면 다른 페르소나를 입고 등교를 했다. 함께 하고 싶은 친구들을 모아 성심껏 안무를 가르쳐줬다. 매년 학교에서 열리는 무대에 빠진 적이 없었고 운동장에는 함성소리로 가득했다. 방과 후 멤버들과 연습을 하던 시간이 행복했다. 무대 위에서의 단 4분을 향하던 하루하루는 어려움과 웃음, 좌절과 성취감이 뒤섞인 삶의 파편 그 자체였다. 








나에게 '욕망'은 멈추지 않는 에너지원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 발로 지독하게 하고 있는 뚝심은 사랑으로 자란 욕망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 욕망은 어떤 색을 입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양을 갖추게 된다. 유시민 작가는 그의 저서 <나의 한국현대사>에서 "먹고 마시고 좋은 곳에서 잠을 자려는 욕망을 충족한 후에야 차원 높은 욕망이 행동의 동기가 있다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생리적 욕망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나도 한때는 연기를 잘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연기를 잘하는 배우만이 살아남는다는 신데렐라 같은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망의 몸짓이 불어나 나를 삼키던 때가 있었다. 하나둘씩 유명세를 얻는 동료들을 보며 나만 안 되는 이유를 찾아야 했던 나는 연기력이 없는 것에, 비전공자라는 타이틀에 탓을 돌려가며 내 마음을 편하게 먹어야 살 수 있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처럼 성공하고 그들처럼 달라진 인생을 살고 싶은 욕망이 연기를 잘하고 싶은 욕망으로 작동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결과는 자기 착취였다. 타인으로부터 탄생한 욕망은 애초부터 길이란 게 없으므로 그 끝은 황량했다. 시키지 않아도 피아노 앞에 앉던 소녀와 그녀들이 너무 좋아서 춤을 멈추지 않던 소녀에게는 그러한 꿈이 없었다. 쟤보다 잘 치고 싶어서 친 게 아니었다. 핑클보다 더 나은 가수가 되고 싶어서 춘 게 아니었다. 사랑과 존중, 희망과 자유로 태어난 욕망은 오늘을 더 잘 살아가게 해주는 에너지 원이 되어줄 것이다. 지금 나를 움직이는 욕망이 어디로부터 탄생된 건지에 대한 출처를 우리는 확인해봐야 한다. 나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꿈은 절대적 고요함 속에서 나 자신과의 대화 속에서만 그 빛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만의 전횡을 사랑하고, 예술 안에서의 자기 객관적의 지를 사랑하는 배우는 어떤 종류의 희생이 창조력과 관련이 있는지 알지 못하며, 그렇기에 그는 그의 당대가 요구하는 혹은 그의 시대가 요청하는 바에 절대로 응대할 수 없을 것이다. 


미하일 체홉의 <배우의 길> 중에. 




@커버이미지 출처 : Head of a woman by Gustav  Klimt   

[출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작성자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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