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8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연기에 빚지며 살고 있습니다.

이유 : 존재의 기초 조건

by 안 희 Jan 19. 2025
아래로



제주도는 나에게 ‘친정집’과 ‘친구’가 있는 정서적 고향이다. 그렇다 보니 계획을 세워놓고 가는 여행이 아니라 이불이 필요할 때 당장 떠나는 여행이 더 익숙하다. 이러한 여행의 장점은 준비 과정이 아주 많이 생략된다는 가벼움과 관광지에서 휴식을 실컷 취할 수 있다는 특권에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이 이불이 되어 나를 반겨준다는 것!




바람이 불면 닿는 곳에 있을 것 같은 나의 오래된 친구 H는 제주가 가진 분위기와 어울리는 영혼을 가졌다. 우리는 중학교 때 단짝친구로 시작해 각자의 성인 시절을 거치고 다시 만났었는데 공백이 질투할 만큼 내적거리감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어른이 되어 만난 우리는 어쩐지 비슷해 보였다. 취향색은 달라도 취향의 방향성이 같았고 운명적 결핍의 껍데기를 벗어나려는 처지가 그러했다. 우리의 만남 속에는 언제나 행복이 동행했다. 서로의 ‘좋아함’을 공유하며 소녀들이 되었고 세월을 늘어놓으며 80세 할머니들이 되었으며 현재의 취약성을 고백하며 5살 어린아이도 되었다.


우리의 가장 큰 공통점은 ‘투쟁’이었다. 그녀와 나는 각자의 절벽에 매달려 지워지지 않을 흉터와 분투하면서 살고 있었다. 부모에게 받은 상처를 스스로 치료하는 법을 택한 우리의 연약한 영혼은 마치 짜인 각본처럼 나란히, 비슷한 정도의 그늘과 비슷한 정도의 햇살을 맞으며 살고 있었고 우연히 그 지점에서 만나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였다.


나는 그녀로 인해 조금 일찍 이모가 되었다. 벌써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막내를 둔 연년생을 키운 내 친구는 언젠가 한 번 자신이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던 건 아이들 덕분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녀는 육아를 하며 발견하는 자신의 민낯을 대면했고 대물림되던 결핍의 피를 자신의 손으로 끊어내려는 노력을 해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잠든 늦은 밤 식탁에 앉아 홀로 자신의 영혼을 살피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면 창 너머로 찰랑이는 소리만이 드러내는 바다의 존재가 더 칠흑같이 느껴졌다.






지난달 우리는 바람이 닿는 곳에서 다시 만났다. 고요한 바람이 부는 북촌의 한 작은 분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사장님의 사랑색이 담긴 떡볶이와 김밥을 먹었다. 바로 앞 창 밖에는 익숙하지 않은 버스색과 차들이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쌀로 만든 떡볶이에서 어릴 때 시장에서 즐겨 먹으며 좋아하던 양념의 맛이 났다. 적당하게 달고 순하게 매운 양념으로 녹진하게 잠긴 떡볶이의 맛이 그 시절의 나로 데리고 갔다. 눈앞에 떡볶이를 먹고 있는 어린 날의 나의 등이 보였다. 웬일인지 늘 뒤따라오던 상흔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분주한 시장터 속에서 이천 원어치 떡볶이를 먹으며 웃고 있는 어린 나만이 보였다. 나는 그때를 곱게 추억하며 말했다.



"시련에 이유가 있는 것 같아.”

"맞아. 나에게 연년생이 찾아와 준 것에도 이유가 있으니까."



나는 연기를 만난 것을 행운이라 생각해 왔다. 연기는 나 자신을 알아야 해서 대본은 삶과 닿아져 있어서, 캐릭터들은 결핍을 드러내고 있어서 덕분에 내가 과거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연기에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며 연기가 없는 삶을 좀 더 끔찍하게 상상하고는 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는 각자가 다른 곳에 ‘빚’을 지며 살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빚’의 존재를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연기에게 ‘빚’을 지며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연기의 ‘빛’을 지니며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연년생'의 빛이 찾아와 준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빛이 조명하는 상흔의 이유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이내 우리의 혀 끝이 잠잠해졌다. 나는 상흔의 흔적을 만지작 거리며 남은 떡볶이 하나를 입에 넣었다. 끝까지 맛있었다.






언젠가 너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엄마가 되어보지도 않는 네가 이런 생각들을 품고 있는 게 신기하다고

나는 말했지 나에겐 연기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다고


그 시간 그 자리에 너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자란 거겠지

고마워 잘 자라줘서, 너무 고마워




                    

이전 15화 '구름'처럼 연기 해주세요.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