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아니 사람이 어떻게 변하니?
요즘은 나이를 가늠케 하는 발언은 잘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옛날 사람'이란 낙인감에 민감해졌다. 아니면 나이에 민감해진 걸지도? 그렇지만 지금은 이야기 전개 상 하지 않을 수 없다. 내 초등학교 시절엔 오전반, 오후반이 있었다. 성인 남자들의 악몽이 군대 재입대이듯 성장기의 나는 오전반 오후반이 헷갈리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때는 바야흐로 마지막 베이비부머 세대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학생을 감당할 수 없는 학교는 분교를 앞두고 있었고 임시 분반이었던지 잠시 담임이 바뀐 적 있었다.
나는 말보다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생각이 말로 이어지는 길이 유독 멀었다. 시간이 걸렸고 중간에 다른 말들로 중단되고 그냥 묻히곤 했다. 생각이 말로 표현되기 전에 막히거나 사라져서 말 보다 생각이 많은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어머니는 나의 말 없음이 항상 걱정이셨다. 예나 지금이나 말이 없는 아이는 살갑지 않다. 별로 사랑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5학년때였다. 5분단의 교실엔 5명의 지도위원이 있었다. 반장을 정점으로 부반장과 몇몇 부장이 피라미드식으로 퍼져 있던 권력구조가 그 해에는 5명의 지도위원으로 재편되면서 집단지도 체제의 느낌도 들었다. 담임은 항상 바빠 보였다. 그리고 우리 5명으로 마치 분신술을 부리듯이 제 분단을 책임지게 했다. 나는 담임의 머리카락 한 올이 된 듯했다. 떠든 사람 관리는 5호 책임제 처럼 했다. 친구가 친구를 감시한 후 5명의 지도위원이 종례 시간에 자기 분단의 떠든 사람 이름을 종이에 적어 교탁 위에 놓아두도록 했다.
나는 적어내지 않았다. 희한하게도 적을지 말지 고민한 기억이 없다. 무슨 배짱이었던지 적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냥 넘어가 주길 바랐다. 그런데 담임은 떠든 사람이 없었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있는데 적지 않았다고 정확하게 생각했다. 역시 프로였다. 생후 139개월 남짓한 아이에게 선생님이란 어떤 존재인가? 절대자다. 왜 적지 않았는지 묻는 대신 "지도위원 하기 싫으냐?"며 물었다. "네"라고 대답했다. 주고받은 대사만 들으면 이건 완전 반정이다. 그렇지만 담임은 나의 직위를 박탈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여전히 그는 아주 바빠 보였다. 그 후로 학교가 갈라지고, 과도기에 있었던 오전 오후반이 없어지면서 담임과도 헤어졌다. 천만다행이었다. 나에게도 당시 담임에게도. 내 생애 첫 저항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가사 시간에 바느질 숙제가 있었다. 손 한 뼘으로 축소된 남자 한복바지를 만들고 있었는데 마무리는 집에 가서 하고 다음 시간에 가져오라 했다. 조용하다고 성실한 건 아니다. 아마도 다음 시간까지 착실하게 숙제를 해가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항상 그날이 오고서야 생각이 나고, 쉬는 시간 중간중간 바느질 숙제를 완성했다. 쉬는 시간에 하다가 수업이 시작되면 잠시 책상 안에 두었다. 그러기를 몇 번씩 반복했다.
드디어 가사시간,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평소 매우 도회적인 옷차림과 말투를 가졌다. 맑으면서도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수업의 안정감을 높였다. 수업시작 전에 숙제검사를 했다. 모두 책상 위에 완성품을 내어 놓고 선생님이 분단 사이를 지나가며 눈으로 확인하는 식이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분명 앞 쉬는 시간에 완성해서 책상 안에 급하게 넣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완성했는데 없어요"라고 할 수밖에. "인정 못해"라며 지나가셨다.
수업 내내 마음이 편지 않았다.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손은 책상 안을 휘젓고 있었다. 당시 별도의 사물함도 없이 모든 책이 책상서랍과 가방 안에 있던 터라 서랍 안은 책들로 만원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모든 책을 꺼내서 친구들과 함께 탈탈 털었다. 순간 어느 교과서 사이에 책갈피처럼 끼여 있다가 어이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무했다. 아침 내내 수업 전까지 쉬지 않고 완성했건만 이런 실수가 있나. 일단 다음 수업을 마치자마자 선생님을 찾아 교무실로 갔다. 선생님은 만나지 못했지만 가사실습실에 계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학생이 없는 실습실은 조용했다. 아마도 선생님들의 휴식공간이었나 보다. 함께 있던 다른 선생님은 나를 보자 밖으로 나가시며 자리를 비껴주셨다. 나와 선생님, 둘만 남았다. 바느질 숙제를 찾았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여기 있노라. 보시라. 했다. 내 사정이 그러하니 평소 나긋나긋한 근육이 좀체 발달하지 않은 얼굴로 최대한 웃는 낯빛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널 어떻게 믿니?" 첫마디였다.
가뜩이나 말이 없는 나는 말문이 막혔다. 가슴은 시간차를 두고 두 번쯤 쿵-, 쿵- 하고 소리 없이 내려앉았던 것 같다. 인사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후 수십 년이 흘렀어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오래 생각해 보았다. 선생님은 잘못이 없다. 순도 100%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내 마음은 또 왜이런가? 결론은 내 위주로 내리기로 했다. 100명 중 혹시 있을지 모를 단 1명을 위해서라도 선생님이라면 학생을 믿어줘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정했다.
결국 내 마음을 다독이려는 자기 합리화였지만 나는 내 장래 희망에서 선생님을 제일 먼저 지웠다.
이쯤에서 끝날 이야기였다. 고백하자면 과거 외삼촌도 선생님이셨고, 친구도 선생님, 아는 팀장 언니도 선생님, 이제는 절친의 딸도 선생님이 되었다. 이런 지정학적 조건에도 끝내 화해할 수 없었던 내 오랜 선생님 기피증은 생각지도 않게 요즘 브런치에서 치유받고 있다. 몇몇 선생님들의 매력적인 글과 사유를 즐독 중이다. 사랑도 변하지만 사람도 변한다. 역시 인생은 그래서 묘하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