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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곶 Oct 27. 2021

감이 익어가는 풍경

스토리가 있는 꽃 이야기 5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장독대 항아리 위로 날아든 붉게 물든 감잎에서 비로소 단풍의 계절이 왔음을 체감한 김영랑 시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초가집 울타리 넘어 주홍으로 물들어가는 감 더미 위로 펼쳐진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쨍하다. 이 일대를 신도시로 개발하는 과정에서 선산을 보존하려는 가문의 바램으로 남겨진 초가 담벼락이 비로소 존재감을 드러내는 중이다.
모든 것을 밀어내고 새로 만들기는 쉬워도 되돌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타이밍에 꼭 맞는 남겨놓기가 중요하다. 감나무 꼭대기에 남겨진 까치밥처럼.
까치밥은 손이 안 닿아 남겨지지만 부러 남겨놓는 경우가 더 많다.


시골 할머니 댁 정원에는 뒤뜰의 감나무를 필두로 살구, 매화, 복숭아, 앵두, 대추, 아기배, 꽃사과 같이 꽃피고 열매 맺는 나무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서있었다.
일본은 자르고 깎고 다듬을 수 있는 상록수 위주의 정원을 선호하지만, 우리 정원에는 유실수가 많다. 사계절 꽃이 피고 열매가 익어가는 자연의 흐름을 집안으로 들이기 때문이다. 나만 소유하는 닫힌 공간이 아니라 지나가는 새들도 함께하는 열린 공간이니 열매는 공동소유다. 이렇듯 우리는 정원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며 자연의 질서를 배운다.
  
맞벌이 생활하느라 삶이 팍팍하던 나의 부모님은 방학이면 나를 시골 할머니 댁에 맡겼다.
우리 땅 남쪽 끝 전남 장흥의 시골마을까지 가려면 광주까지 고속버스로 가서 완행버스를 갈아타고 한참은 더 가야 했다. 심지어 유치라는 고개를 넘어갈 때는 승객들이 모두 내려 버스 뒤를 밀어야 했다. 주위가 온통 깜깜한 칠흑 같던 어둠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 지리한 귀향길 끝에 할머니 댁 뒤뜰에 선 커다란 감나무 세 그루가 두 팔 벌리고 반겨주곤 했다.
그 감나무에는 봄에 감꽃이 조롱조롱 달려 동네 아이들의 주전부리감과 장난감이 되었다는데 여름, 겨울방학 이외에는 감나무를 보지 못한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귀여운 감꽃을 처음 만났다. 감꽃이 그렇게나 사랑스러운지를 뒤늦게 알게 되어 얼마나 억울했던지. 마치 꼭 있어야 할 추억 속 앨범 한 장을 빼앗긴 느낌이랄까

성북동 최순우 고택에서 만난 조롱조롱 귀여운 감꽃들

겨울방학에 내려가면 그 감나무에서 딴 내 얼굴만 한 대봉시가 대나무 광주리에 가지런히 담겨 시렁 위에 얹혀있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광주리 속 잘 익은 감을 골라 조심스레 반을 갈랐고, 윤기 나는 속살을 스푼으로 떠먹는 것이 최고의 간식이었다.
감은 단 것이 귀했던 시절, 귀중한 과일이었다. 고종은 특히 감을 좋아하여 그가 좋아했던 감 품종에 '고종시'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편액을 쓴 창덕궁 낙선재의 장락문 앞에 아들 고종이 좋아하던 감이 달렸다. 을미시해 사건으로 사이가 틀어져 소원하던 아들의 얼굴도 못 보고 죽어간 흥선대원군, 그의 호쾌한 글씨체와 아들이 좋아했던 감의 투샷이 왠지 씁쓸하게 여겨진다.

낙선재 장락문 앞에 고종이 좋아했던 감이 달렸다

영조는 그의 이복형 경종에게 간장게장과 홍시를 올려 그의 죽음을 재촉했다는 의혹이 평생 따라다녔으니 홍시를 멀리하지 않았을까?

감은 맛도 좋을 뿐만 아니라 효능 또한 뛰어난데 말이다.

동의보감에 '홍시는 심장과 폐를 눅여주며 갈증을 멈추게 하고 폐와 위의 심열을 치료한다. 식욕이 나게 하고 술독과 열독을 풀어주며 위의 열을 내리고 입이 마르는 것을 낫게 하며 토혈을 멎게 한다'라고 했다. '곶감은 몸의 허함을 보하고 위장을 든든하게 하며 체한 것을 없애준다. 또 주근깨를 없애주고 어혈(피가 모인 것)을 삭히고 목소리를 곱게 한다'고도했다.

감은 눈 건강에 필수인 비타민A를 비롯 비타민과 미네랄의 보고이며 항산화 성분이 풍부하다. 따라서 감은 설사가 잦은 어린아이에서부터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갖고 싶은 사춘기 소녀를 포함해 숙취로 고생하는 애주가 어른에게까지 남녀노소 모두에게 선물 같은 과일이다.

더욱이 감잎을 말려서 우려 마시는 감잎차는 감보다 비타민C가 많이 들어있어 면역력을 높여주고 성인병을 예방해준다니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다.  

감의 쓰임새는 먹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제주도에서는 무명천에 감물을 들여서 '갈옷'을 만들어 입어왔다. 갈옷은 땀 묻은 옷을 그냥 두어도 냄새도 나지 않고, 썩지 않는다. 감물이 방부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또한 통기성이 좋고 물방울이나 진흙 따위가 잘 붙지 않고 떨어진다. 갈옷은 제주민들이 제주의 길고 습한 여름 내내 거친 자연환경에서도 밭일 물일을 가능케 하는 비장의 무기, 갑옷이었다. 갈옷의 정확한 역사와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중국 남쪽에도 갈옷을 입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몽고의 지배를 받던 고려 충렬왕 때 전래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갈옷입고 감물들이는 과정이 전시된 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

감나무 속에 검은 줄무늬가 들어간 것을 먹감나무(烏枾木,오시목)라 하는데, 자연이 그린 한 폭의 산수화 같은 이 문양은 사대부 집안의 가구, 문갑, 사방탁자 등에 장식용으로 자주 쓰였다

마치 자연이 그림을 그린 것같은 먹감나무를 활용한 문갑-출처:국립민속박물관

감은 일곱 가지 덕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장수하며, 그늘을 크게 드리우며, 새가 둥지를 틀지 않으며, 벌레 먹지 않으며, 가을에 붉게 물든 잎이 아름답고, 열매가 달고 맛이 있으며, 감잎이 두툼하고 커서 글씨를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감 시(柿)와 일사(事)가 동음인 까닭에 사사여의(事事如意 : 하는 일마다 뜻대로 이룸)나 백사여의(百事如意 :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룸), 즉 모든 일이 평안하기를 소망하는 의미로 감을 사용했는데 우리나라 책거리 그림이나 민화에서 감 그림을 자주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같은 맥락에서 화병[화평, 평안 상징한다]에 감나무 가지를 꽂은 그림은 모든 일이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책거리 그림에 등장한 화병에 꽂은 감-호암미술관 소장

한편 건축물의 단청에 '주화(朱花)'라고 불리는 문양이 자주 눈에 뜨인다. 이는 감의 꼭지를 도안화한 것으로 뿌리가 단단한 감나무처럼 건축물이 오래도록 튼튼하고 그 안에 사는 이들이 오래 평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경복궁 단청에 그려진 주화.흰 동그라미친 부분. 감꼭지 모양이다

조율이시(棗-대추, 栗-밤, 梨-배, 枾-감)

차례상에 오르는 과일 목록이다.

이 중에서 감은 씨앗이 여덟 개. 전국 8도의 관찰사처럼 걸출한 인물이 될 수 있도록 조상에게 아부하던 과일이다.

심은 데는 콩 나고 팥 심은 데는 팥이 나는데, 감 심은 데는 감이 안 나고 돌감이 난다. 과육은 별로 없고 종자뿐인 고욤만 조롱조롱 열린다.

조롱조롱 달린 고욤. 모양은 감이지만 훨씬 작다

감나무는 생가지를 잘라 이 고욤나무에  접붙여야 감 열매를 풍성히 수확할 수 있다. 비록 고욤으로 태어났지만 제대로 열매를 맺으려면 선인들의 지혜가 접붙여지기를 향한 바람이 담겼다.

생가지를 자르는 것은 아픈 일이고, 잘려낸 가지가 남의 가지더부살이에서 한 몸이 되기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모든 일을 바라볼 때 확실한 주관이 생긴다. 좋은 말로 주관이지, 나쁜 말로는 똥고집, 꼰대 마인드일 때가 더 많다. '요새 세상이 암만 빨라져도 역시 옛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합리화하지만 나의 생각은 접고 새로운 시각을 받아들여야 할 상황이 실은 더 많다. 나이 들어도 생가지 자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밑가지를 찾아 접붙는 성숙한 감나무처럼 살아주길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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