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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지 Apr 05. 2023

나는 동물이다 <짐을 끄는 짐승들>을 읽고

<짐을 끄는 짐승들>의 저자 수나우라 테일러는 장애운동가, 동물운동가인 동시에 선천성 관절굽음증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녀가 썼듯이 장애는 자신의 정체성에 필수적인 부분이며,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창의적인 장이다. 나는 관절굽음증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그녀의 글에 의지해 그 경험을 상상하다 수나우라 테일러를 구글링 했다. 그러다 그녀가 화가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테일러가 처음 동물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던, 닭을 빽빽이 실은 트럭. 테일러는 그 장면을 그리며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거대한 규모로 착취당하고 살해되는지 깨닫기 시작했다고 했다. 트럭 그림은 찾지 못했지만 그녀의 다른 그림들을 보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어떤 감정이라고 설명하기 힘든, 어린 시절 기묘하고 슬픈 동화를 보고 받은 충격과 비슷했다.


테일러가 보여준 세계를 통해 나는 배워야만 하는 고통도 있다는 걸 깨닫는다. 이 책은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전복시킨 후 다시 날카롭게 묻는다.


장애인과 동물은 특정 신체적, 정신적 역량을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능력하고, 열등하고, 비정상적이며 의존적인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이성, 언어와 같은 특정한 능력에 특권을 부여하는 비장애중심주의에서 멀쩡한 몸은 항상 비장애 신체를 가진 인간의 몸이다. 이는 종 사이의 위계를 강화하며 비인간 동물을 억압한다. 이처럼 비장애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 아래 장애인은 오랜 시간 동안 동물화되었고, 동물은 착취당하고 상품화되었다.


장애의 사회적 모델에 따르면 장애는 손상이나 생물학적 결함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건축물이나 계단, 버스, 신호등 같은 구조물은 모두 특정한 몸을 상정하고 만들어졌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인식하는 환경은 모두 특정한 몸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것이란 무엇인가? 테일러는 관절굽음증으로 인해 손이 아닌 입을 사용한다. 파트너와의 데이트에서 손을 잡을 수 없어 서글펐지만 과연 자신이 장애인과 비장애인 커플이 흔한 문화에서 자랐다면 어땠을지 물음을 던진다. 팔꿈치와 어깨를 기울이며 산책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자랐다면 똑같은 상실감을 느꼈을지를. 자연스러움이란 특정 문화적 맥락과 가치 체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슬픔조차도). 테일러는 장애가 부정적인 경험이라는 전제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하며, 장애를 경험하는 몸은 세상과 소통하는 창조적인 방식이 될 수 있으며, 존재의 다양성 자체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장애는 산업화된 농장의 동물들에도 만연하다. 산업에 이윤을 내기 위해 동물들은 장애를 입고 기계처럼 고기와 우유, 계란을 생산한다. 실험실, 서커스단, 동물원의 수많은 동물들은 정신병과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인다. 테일러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어떻게 감금, 학대, 방치, 교배 그리고 고통과 장애를 분리할 수 있겠는가.’ (p.96)      


오랫동안 동물화 되어 온 장애인의 권리와 동물의 권리를 양립시키는 것은 민감하고도 복잡한 작업이다. 이에 테일러는 치열하게 묻는다. 인간성과 동물성을 어떻게 동시에 긍정할 수 있을까? 동물과 비교당하는 것이 모욕적인 이유는 동물이 열등한 존재라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애를 둘러싼 억압과 동물을 둘러싼 억압이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한다면, 우리가 동물임을 자처함으로써 우리 모두를 억압하는 폭력에 저항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해방의 틀을 제시한다.


그리하여 테일러는 자기 자신이 동물임을 주장하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녀는 공적인 장소에서 손 대신 입을 쓸 때 스스로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고 했다. 입은 동물적이고, 손은 인간적인 것으로 은유되기에 테일러는 자기 자신에게서 동물성을 느낀다. ‘나는 내 형상 속에서 동물을 느낀다. 이 느낌은 교감의 일종이지 수치심이 아니다. 나의 동물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내 몸이나 다른 비규범적이고 상처 입기 쉬운 몸들이 자신의 주변 세계를 움직이고, 보고, 경험하는 방식으로 존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동물화 된 부위와 움직임에 대한 주장이고, 내 동물성이 내 인간성에 필수적이라는 주장이다.’ (p.208)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질문하는 많은 것들은 잘못된 이분법과 위계적인 가치 체계를 전제로 한 것이다. 이에 테일러는 위계의 철학 자체를 거부한다. 예를 들어 인간을 죽이는 것과 닭을 죽이는 것이 동등하게 나쁜가? 하는 질문은 서로 다른 삶들의 가치를 대립시키는 잘못된 이분법이라는 것이다.


의존과 자립의 이분법 또한 마찬가지다. 가축과 장애인 모두 의존적인 존재로 간주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의존의 스펙트럼을 따라 존재한다.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취약하고, 불완전하고, 상호의존적인 존재다.


책을 덮은 후 내 주변 동물의 삶을 다시 읽어낸다. 얼마 전 동물원을 탈출한 얼룩말 세로를 생각했다. 테일러에 따르면, 동물이 말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억압당했지만 감금된 곳에서 도망친 동물들의 수많은 사례를 통해 동물들은 언제나 의사표현을 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만 우리가 들으려 하지 않거나, 멋대로 해석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세로가 삐지고, 반항했다는 매체 속 표현이 불편했는데 이로써 확고해졌다. 세로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생존의 사투를 벌인 것이다.


또 하나는 얼마 전 입양 간 고양이 사랑이에 관한 생각이다. 사랑이는 다리의 장애로 발바닥으로 바닥을 딛는 대신, 발등으로 바닥을 딛는다. 수의사 소견에 의하면 사랑이에게는 별다른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고 했지만, 나는 최근까지도 여전히 의사가 발견하지 못한 다른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익숙한 방식으로 걷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이에게 여전히 의학적 문제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는 ‘장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인간동물에까지 투사한’ 것으로, 최적의 동물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전제는 취약성이나 약함, 상호의존 같은 경험의 가치나 자연스러움을 부정한다. 의료적인 문제와는 별개로 이제는 사랑이의 장애를, 발등을 새롭게 사용하는 방식으로 볼 수도 있다고 깨닫는다.


이 책을 꽤 오랫동안 붙들며 힘겹게 (두 번) 읽으며 수나우라 테일러는 혁명가가 아닐까 생각했다. 테일러의 사유를 따라가다보면 이런 세계가?! 하게 된다. 성의 변증법과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공부했으면) 하는 아름다운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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