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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확천금의 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유령마을 보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보디 역사공원

요세미티 국립공원 동쪽에 자리한 매머드(Mammoth)라는 동네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스키 슬로프와 산장이 오밀조밀 모여있어 넷플릭스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에 나올법한 정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아직 가을이지만 해가 지고 난 후 밤은 제법 쌀쌀했다. 숙소에는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모닥불이 놓여있었다. 스위치 한 번 달칵하면 불이 화르륵 켜졌다. 장작이 아니라 가스로 때는 방식이었다. 공기가 조금씩 훈훈해졌다. 깜깜한 바깥엔 아무도 돌아다니지 않는다. 한산한 이 마을도 크리스마스 즈음이 되면 사람들로 붐비고 활기를 띨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친구에게 어디를 가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티오가 호수변에서 트레킹을 해도 좋고, 멀리서만 봤던 모노 호수 근처를 가봐도 좋고. 아니면 매머드에서 뒹굴거리다가 샌프란시스코로 넘어가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구글 맵 속 ‘가고 싶은 장소’ 목록에 찍힌 작은 마을을 보게 되었다. 한참 전에 골드러시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이런 것도 있구나, 흥미를 느껴 저장해 둔 ‘보디’라는 마을이었다.

    

보디(Bodie)는 유령마을이다. 

영어로는 고스트 타운. 심령 현상이 일어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떠나고 폐허가 된 마을을 말한다. 친구는 시체(Body)와 발음이 같아서 설마 그런 뜻이냐고, 무섭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을 처음 개척한 사람(W.S. Bodey)의 이름을 땄다. 그리고 골드러시로 인해 만들어져 급속도로 성장했다가 갑자기 유령마을이 되어버린 곳 중 가장 큰 규모다. 가끔가다 폐가는 마주쳐도 도시 전체가 버려진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으스스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낼지 궁금해졌다.

     

약 한 시간 산속을 달렸다. 내비게이션은 도그 타운 근처에서 갑자기 샛길로 빠지라고 안내했다. 그 길로 향하는 건 우리 차뿐인 것 같았다. 붉은색 돌산이 양옆으로 펼쳐지고, 그사이에 놓인 좁은 도로를 계속해서 달렸다. 한참 후, 이번엔 비포장길이 나왔다. 편평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꽤 울퉁불퉁해서 타이어가 잘 버텨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엉덩이도 마구 들썩거렸다. 캘리포니아 사막에서 자라는 노란 브리틀부쉬(Brittlebush)를 제외하곤 황무지나 다름없는 메마른 땅을,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찾아왔던 것일까?     



# 1849년의 골드러시, 포티나이너스     


1834년, 한 미국인이 빚쟁이를 피해 새크라멘토 부근의 농지에 터전을 잡았다. 당시 일대는 미국 땅이 아니라 멕시코의 관리 아래 있었기 때문에 멕시코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게 웬 떡인가. 목재사업을 위해 제재소를 짓는 와중에 우연히 금 조각을 발견했다. 골드러시의 시작을 알리는 엄청난 발견이었다. 이후, 1846년 멕시코와 미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고, 1848년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을 통해 캘리포니아는 공식적으로 미국에 합병되어 31번째 주가 되었다.  

   

금 조각을 발견한 미국인은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싶어 했지만, 소문은 발 없는 말처럼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얼마 후, 1849년을 기점으로 사람들이 구름 떼로 몰려 들어왔다. 사금을 찾아 헤매며 미국 서부의 광활한 땅을 구석구석 파헤쳤다. 금만 발견한다면, 금방 부자가 될 테니까! 일확천금을 노리는 수많은 사람은 그렇게 서부에 정착했고, 서부의 개척과 번영을 가져왔다. 그들은 1849년에 왔다고 하여 포티나이너스(forty-niners)라고 불린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를 안겨준 금싸라기땅 캘리포니아주는 골든 스테이트(golden state)라고도 말한다.      


그렇지만 모두가 금을 찾는 데 성공한 건 아니었다. 넓디넓은 땅덩어리에서 금맥을 찾는 건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캘리포니아의 광활한 자연은 하잘것없는 인간의 관점에서 위험이 도사리는 곳이었다. 뜨거운 태양, 거칠고 빠르게 흐르는 강물, 깎아지른듯한 절벽 길, 메마른 사막. 일확천금을 노리고 눈이 뒤집힌 포티나이너스에게도 이곳은 버티기 쉽지 않았다.

   

보디 마을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패널이 마을 입구에 있다.

  

보디(W.S. Bodey)는 뉴욕 포킵시 출신으로, 1859년 현재의 보디 지역에서 금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커다란 땅에서 금맥을 찾았으니, 대단히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그는 눈보라로 인해 곧 사망해 버렸다. 사실 보디는 보디 마을에서 별로 살지도 못했고, 생전에 마을에 그의 이름이 붙게 될 것도 몰랐다고 한다.     


그가 사망한 이후, 다른 사람들도 잇따라 보디 지역에 정착하며 광산 채굴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채굴 속도가 더뎠다. 그러다가 1875년 광산이 붕괴하면서 그 안에 매장된 풍부한 금광석이 발견되자 광산업은 빠른 물살을 타게 되었다. 보디는 ‘붐 타운’, 즉 급속도로 성장하는 신흥 도시로 부상했고, 1877년부터 1881년까지 전성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보디의 거주민은 약 8천 명에서 무려 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보디에는 약 30개의 광산과 9개의 쇄광기가 있었다. 다양한 회사의 이름으로 광산을 파고들었고, 광부의 수도 많았다. 그러나 보디의 반짝반짝 빛나던 골드러시는 오래가지 못했다. 1900년대 초에 들어서 광산이 차례로 실패하며 쇠락했다. 마지막 광산은 1942년에 문을 닫고야 말았다. 먹고 살길을 잃은 마을 사람들도 순식간에 떠나갔다. 그리고 1962년 캘리포니아 주립 공원은 마을 부지를 구입하여 역사지구로 보존하고자 했다.   

  

골드러시가 끝나고 버려진 폐허를 바라보며 ‘오리건주의 바이런’이란 별명이 붙은 시인 호아킨 밀러(Joaquin Miller, 1837∼1913년)는 아래와 같은 시를 남겼다. (번역본은 따로 찾지 못해 내 맘대로 번역한 버전이다.)

    

이제 나의 동지들은 모두 사라졌고,
건배할 거리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구나.
나는 이곳에 비참하게 버려졌다네.
방황하는 불쌍한 유령같이.

And now my comrades all gone;
Naught remains to toast.
They have left me here in my misery,
Like some poor wandering ghost.

- Joaquin Miller, "The Day of '49"



# 사람들은 떠났고, 이야기만 남았다.     


비포장도로의 끝에 저만치 멀리 보디 역사공원의 모습이 보였다. 깜짝 놀라는 한편 안도감이 들었다. 사람과 차량이 바글바글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생각보다 인기 있는 여행지였던 것이다. 유령마을이지만, 관광객들의 발길로 활기가 돌았다. 대부분 미국인에, 노년층이 많았다. 서부지역에서 온 관광객이라면, 왠지 간접적으로 골드러시와 관련이 있겠다 싶었다. 골드러시로 서부에 터를 잡은 선조들의 후손이라면, 보디가 고향과도 같은 기분일까?     


몽골 초원처럼 넓은 들판에 집이 듬성듬성 남아 있다.
유리창 너머로 술병이 선반에 잔뜩! 집주인이 술을 좋아하는 데다 수집벽도 있었던 게 틀림없다.
가운데 쏠리며 무너지는 모습이 암스테르담의 집과 비슷하다. 또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과도 비슷하다.
제일 무서웠던 내부. 다 뜯어지고 해진 가구들은 어딘가 모르게 섬찟하다.


마을에는 건물이 수십 채 있었다. 그런데 전성기 때와 비교하면 불과 5%만 남은 것이라고 한다. 얼마나 큰 마을이었는지, 규모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건물에는 숫자가 붙어 있어 관람객이 순서대로 따라 걸을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집집마다 이름이 붙어 어떤 사람이 살았는지, 어디서 왔고, 직업은 무엇이었고, 특별한 사건 같은 게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맥도널 하우스(McDonnell House), 케인 하우스(D.V.Cain House), 밀러 하우스(Miller House) 등…. 한 명씩 이름을 곱씹어보며 길을 걸었다. 도널드 맥도널과 그의 아들 프랭크는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였고, 도널드의 아내 메리는 보디의 우체국장이었다. 케인은 보디의 땅을 캘리포니아 주립 공원에 판 지주였다. 밀러는 원래 캐나다 사람이었지만 모노 호수 근처에서 트럭 운전사로 일하다가 가족과 함께 보디에 정착했다.     


멀리서 보고 가스등? 수도펌프? 궁금했는데 바로 오일펌프였다.
보디 뮤지엄의 내부 모습이다. 보디 주민들의 소장품, 사진자료, 문서 등을 전시했다.
보디 감리교회의 모습이다.

가정집 이외에도 마을에는 많은 시설과 기관들이 존재했다. 1920년대부터 사용하던 주유 펌프, 최대 615명의 학생이 등록했던 학교,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광부조합회관(Miners Union Hall) 건물 등. 광부조합회관 건물은 1878년 만들어져 보디 사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는 종교적 의례도 행하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개최하기도 하고, 가면무도회가 열리기도 했다. 보디 뮤지엄에서 옛 사진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 시절 보디 주민들이 얼마나 재밌는 생활을 영위했을지 엿볼 수 있었다. 또한, 감리교회, 이발소, 은행, 카페, 소방서, 감옥, 시체 보관소 등 없는 것이 없다.     


왜 무섭게 커튼은 다 찢어져 있는 것인지, 보디의 한 호텔의 모습이다.


심지어 호텔도 있었다!

미국인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보디에는 이탈리아, 아일랜드, 영국, 멕시코, 프랑스, 독일, 캐나다 등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중국인들도 있었다. 덴마크에서 온 23세의 젊은 여성은 보디에서 살던 미국인 남성을 만나 사랑에 빠져 그대로 정착하기도 했다.      



# 이야기조차 남지 않은 차이나타운     


미국으로 여행 오기 전, 읽었던 소설책이 생각났다. 한국에서는 ‘백 년이 넘은 식당, 황금성’이라고 번역된 리사 이의 소설 <메이지 첸의 라스트 찬스(Maizy Chen’s Last Chance)>다. 2022년에 발간된 따끈따끈한 신작이고, 주인공 메이지 첸은 중국계 미국인이다. 메이지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이민 1세대니까 중국계 미국인 5세쯤 되겠다. 고조할아버지의 이름은 러키인데 중국의 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가난에 시달렸다.


러키는 시장에 나가 동네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좋아했지만,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금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신기한 세상 이야기였어. 그곳 미국에서는 그 누구도 굶주리지 않는다고 했지.
“내 손자는 바다를 건너 금산을 찾으러 갔어.”
어느 노인이 뻐겨 댔지.
“금산을 찾아서는 매달 돈을 부친다니까.”
“미국이 진짜 있는 곳이에요?”
놀란 러키가 묻자 노인은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금덩이를 꺼내 하늘 높이 치켜들었어.

 - 리사 이, <메이지 첸의 라스트 찬스> 중에서 일부


러키는 시장에서 금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미국에 가기로 결심한다. 중국인은 샌프란시스코를 ‘금산(金山)’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금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머나먼 중국까지 전해졌던 것이다. 유령마을 보디에도 한때 중국인들이 살았다.     


188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보디에는 253명의 중국인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북서쪽, 보난자 스트리트(Bonanza St.) 쪽에 중국인들이 모여 집단 거주지를 만들었다. ‘보난자’는 광석이 집중된 지대, 노다지를 의미한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지만, 인구는 253명보다 훨씬 많았을 거라고 보디 역사공원은 설명한다. 그러나 중국인은 광부 조합(Miners Union)에 끼지도 못했고 미국인들보다 저임금으로 동일한 일을 했다. 턱없이 부족한 수입원은 채소 판매, 세탁소, 땔감 등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는 이미 끝났지만, 금광에 일하러 온 중국인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여비가 없어 못 갔을 거야. 중국인은 같은 일을 하고도 돈을 적게 받았거든. 중국인은 미국에서 아무 권리도 없었고, 백인과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수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단다.
그래도 일거리는 많았지.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 서쪽 노선인 ‘센트럴 퍼시픽 철도’의 철길을 만들 노동자가 필요했고, 중국인은 목숨을 걸고 열심히 일하기로 유명했어. …(중략) 그중에서도 제일 위험한 임무는 ‘중국 놈’이 맡았어. 그 일을 맡은 사람은 밧줄에 묶여 절벽 아래로 내려가서 화강암 절벽을 뚫고 불을 붙인 다이너마이트를 밀어 넣었어.

 - 리사 이, <메이지 첸의 라스트 찬스> 중에서 일부


러키도 마찬가지였다. 광부로, 철도 노동자로 힘든 일을 도맡아 했지만 벌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다이너마이트를 밀어 넣는 일을 맡게 되면 죽을 위험이 아주 컸다. 중국인들은 서부 개척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역사에, 기록에 새겨지지 못했다. 보디 마을에서는 중국인의 이름이 붙은 집을 찾을 수가 없고, 그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자료도 없으며, 쇠락한 후엔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부각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 처지는 마치 샌프란시스코의 드 영 뮤지엄에서 눈길을 사로잡았던 아래의 그림과 같았다.


윌리엄 한, <새크라멘토 기차역>, 1874년 작품, 드영 뮤지엄 소장
확대해서 보면, 기차역 앞 다이내믹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윌리엄 한(William Hahn, 1829-1887년)은 새크라멘토 기차역의 모습을 그림에 담았다. 새크라멘토 역은 센트럴 퍼시픽 철도의 서쪽 종착역이었다. 대단한 기업가들의 자금을 지원받아 깔린 철도 앞에는 번창한 도심이 잘 드러난다. 중앙에 그려진 마차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짐을 쏟아 굳어버린 얼굴의 남자가 보인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예쁘게 차려입은 어린 딸과 개를 키우는 부유한 가족, 만나서 반가운 것인지 헤어져서 아쉬운 것인지 모를 애틋한 또 다른 가족의 모습이 자리한다. 그 속에 중국인을 한 번 찾아보자. 숨은 그림 찾기처럼 재미있다.      


중국계,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발견했다!


아주 조그맣게 보인다! 중국식 복식을 하고 지게를 진 모습의 남자가 걸어가고 있다. 가장 왼쪽에는 흑인의 모습도 있다. 중국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이 그림에서 분명 그려졌지만, 아주 미미한 존재감을 가진다. 이제까지 미국의 역사에서 그들을 다뤘던 비중과 다르지 않다.     


 <메이지 첸의 라스트 찬스>에서처럼 소설 속에서 그들의 삶이 재구성되고 이야기로 전해질 수 있다는 점이 다행이다. 비록 꾸며낸 것일지라도 유령마을 보디의 집을 돌아다니며 집주인의 이야기를 만난 것처럼 생생하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차이나타운을 꼭 가보자. 이곳에서는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떠돌아다닌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한 골목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보디 역사공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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