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게 얼마나 거슬리는지 모르겠다. 하필이면 자주 사용하는 왼손 검지라서 더욱 그렇다. 왼손 엄지 끝에 촉각을 곤두세워 검지를 슬슬 문질렀다. 가시가 어디에 박혔는지 찾아내기 위해서다. 손톱으로 눌러가며 가시를 밀어 밖으로 빼내려고도 했다. 그러나 피부 아래에서 요리조리 굴러다니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다. 어쩌다 찾아내면 가시의 끄트머리가 보이긴커녕 소름 끼치는 통증만 안겨줄 뿐이었다.
두 시간 후면 시애틀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타야 한다. 하는 수 없이 공항의료센터를 찾았다. 얼마 전,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게스트로 나온 의료센터 원장님을 보고, 공항에 진찰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처음 찾은 공항의료센터는 지하 주차장에서 바로 연결되었다. 센터는 한산했다. 곧바로 데스크로 가서 진료 신청 서류에 ‘손가락 가시 박힘’이라고 작성했다. 너무나 하찮다.
진료를 기다리면서 ‘걱정병’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무슨 병이냐면, 사소한 요인이 머릿속에서 부풀려져 어마어마한 결과로 치달아버리는 상상력의 병이다. 손가락 안에 돌아다니는 가시는 염증을 일으키고 세균이 독소를 옮겨놔 패혈증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해결을 보지 못한다면? 미국에서 병원에 가본 일도 없는데, 말도 통하지 않고 어버버 하다가 과잉 진료를 받고 보험의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게 될 것이다! 상상 속에선 언제나 끝장을 본다. 당장 빼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다시, 진정하기 시작했다. 곧 만나게 될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만 들으면 살 수 있다. ‘그깟 가시, 손가락에 박혀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어요’ 라거나. 아니면 ‘가시는 몸 안에서 녹을 거고요. 우리 몸엔 그 정도 방어 기능이 있어요’ 라거나. 아무것도 아닌 걸로 병원을 왔냐는 식으로 대해준다면, 그것이 비록 지금은 나에게 등골이 쭈뼛해지는 통증을 안겨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진료실로 안내를 받았다.
손가락 속 가시를 대하는 의사와 간호사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바늘로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어딘가에 숨어있는 가시 찾기에 몰입했다. 뭔가 전문적인 의료기기나 하다못해 돋보기로 손가락을 확대해 볼 거라고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진료는 친숙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나는 한참 동안 손가락을 들여다 봐주는 친절한 두 분 선생님에게 질문했다. 선생님, 가시 안 빼도 괜찮지 않아요? -아니죠. 염증을 일으킬 거예요. 이물질이니까.
의사 선생님은 ‘손가락 가시 박힘’ 환자에게 어떤 일까지 일어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가시를 얕보고 방치했다가 맞이한 끔찍한 말로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거 안 빼면 큰일 나는 거구나…. 덜컥 겁이 났다. 걱정병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 다음 날, 미국의 한 정신병원
시애틀에 도착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오리건주 세일럼까지 자동차로 약 3시간 30분을 달려야 했다. 빠듯한 스케줄에, 장시간 비행으로 쌓인 피로와 손가락 가시 박힘.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혹시라도 왼손 검지를 쓰게 될까 봐 온 신경을 쏟았다. 공항의료센터에서는 별 소득이 없었고, 가시는 아직도 손가락 안에 있다. 시애틀 공항에서 입국 심사하던 직원의 폭풍 잔소리도 단단히 한몫했다. 미국에서 다닐 곳을 줄줄이 읊었더니 호되게 혼이 났다. 너는 뉴스도 안 봤냐, 지금이 어느 땐데 그렇게 돌아다녀, 거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그렇지 않아도 외교부에서 보낸 문자가 막 도착한 참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호놀룰루, LA, 라스베이거스 등 차량털이 빈발, 차량 내 귀중품 보관 지양. LA 총기범죄, 노숙자범죄 다발. 야간 도보 이동 자제, 주변경계.’
걱정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뉴스에서 언뜻 듣긴 했다. 그런데 위험한 일부 지역이나 시간대만 피하면 문제없는 것 아니었나?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일까? 안전불감증인가? 미국의 도시 길거리에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데? 렌터카를 픽업하려고 들른 주차장에는 유리창이 깨진 차량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어떤 차는 깨진 창을 두꺼운 청테이프로 둘둘 감아놓았다. 길거리에는 은행털이범처럼 검은 복면을 쓴 사람들이 다녔다. 이번에야말로 운 좋게 피해왔던 문제가 터져버릴 것 같은 나쁜 예감에 사로잡혔다.
오리건 주립병원 정신건강 박물관의 외관이다.
미국에 도착하고 첫 일정은 오리건주 세일럼에 있는 정신병원이었다.
정확히는 1883년부터 정신병원으로 운영되다가 2013년 ‘오리건 주립병원 정신건강 박물관(OSH Museum of Mental Health)’으로 개관한 정신병원 박물관이다. 이곳은 1975년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직접적인 배경이자 촬영지이기도 했다. 번잡하고 범죄율이 높은 도시를 피해 달아나기엔 안성맞춤인 곳이지 않은가? 영화의 주인공 맥머피도 형무소에서 강제 노동을 피하려고 미치광이인 척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뮤지엄 오픈! 이렇게 반가울 수가.
고속도로를 달려 세일럼에 도착했다. 통행료 징수도 없고, 과속방지 카메라도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프리웨이(freeway)다. 이 길의 끝에, 내비게이션은 도착지인 정신병원 박물관에 도착했다고 알려주었다. 빅토리아 건축양식으로 된 붉은 벽돌의 기다란 건물 중앙에 ‘박물관 문 열었어요(Museum Open)’ 팻말이 보였다. 반가운 사인이었다.
시계를 확인했다. 도착시간 토요일 오후 1시. 오리건주 정신병원 박물관은 일주일에 단 3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오후 12시부터 4시까지만 운영한다. 즉, 주 12시간이다. 이토록 짧은 운영시간 때문에 나는 다른 스케줄을 모두 제치고 이곳부터 방문해야만 했다. 박물관이 문 열었다는 팻말이 반가운 이유였다.
계단을 올라 내부에 들어가니 좁은 리셉션 공간이 나왔다.
자원봉사자 명함을 가슴팍에 달고 있는 인상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계셨다. 일반 박물관 관람객이 받을 수 없는 엄청난 환대와 ‘심지어 그렇게 먼 한국에서 찾아왔다고?’라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미소 지어졌다. 세상에, 오늘 외국인은 체코에서 온 손님밖에 없었는데, 물론 체코에서 온 건 아니고 캐나다 밴쿠버에 사는 체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한국에서 찾아온 건 정말 굉장한 일이지. 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여기까지 오는 데 비행기만 10시간이 넘고요, 엄청나게 오래 걸렸어요. 이곳은 꼭 오고 싶었거든요….
자원봉사자 할머니는 입장료를 결제하고 리플릿을 챙겨준 후, 이번에는 도슨트로 변신했다. 나를 데리고 이리저리 다니며 박물관의 역사와 전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 박물관의 자랑은 소설 원작의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배경지라는 사실이었다. 캐나다에서 온 체코인 관람객들도 아마 밀로스 포만 감독과의 인연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 것이다. 밀로스 포만 감독은 프라하와 가까운 차슬라프(Čáslav) 출신의 체코 사람이었으니까.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장면들
영화의 주요장면들은 전시실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맥머피의 얼굴이 문에도 장식되어 있다.
할머니는 내게 영화를 봤냐고 물어보셨다.
거장 밀로스 포만 감독과 잭 니콜슨 주연의 유명한 영화지만, 워낙 오래되어 난 겨우 이름만 들어봤고, 유튜브에서 30분짜리 축약본으로 대신한 터였다. 영화를 진작 챙겨보지 못한 죄책감에 약 3초간 정적이 흘렀다. ‘유튜브로 보긴 했는데요. 짧은 버전으로 만든 거요.’ 솔직하게 말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영화와 박물관에 대한 예의를 다하지 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할머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라고 했다. 나는 왜 주 3일만 운영하는지 질문했다. 왜 이렇게 운영시간이 짧아 10여 시간을 날아온 외국인 관광객이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게 만들었을까? 할머니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스태핑(staffing)’이라고 답했다. 코로나 감염병 이전에는 일주일에 5일씩 문을 열었지만, 현재는 자원봉사자 수가 줄어들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종종 이렇게 자원봉사자가 직원처럼 일하는 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뻔하게도, 자금난과 재원 문제 때문이다. 이곳은 자원봉사자마저 부족해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일하고, 운영일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다.
# '언덕 위의 하얀 집'엔 누가 살았을까?
잠시 도슨트로 변신했던 자원봉사자 할머니와 헤어지고, 혼자 전시를 관람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박물관에서는 19세기말부터 현재까지 정신질환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보여주고, 옛날 정신질환자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박물관의 전시를 관람한다는 것은 역사소설 한 권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
사실에 기반한 정보를 가득 담고, 잘 짜인 스토리보드를 기반으로 서사를 풀어 나간다. 큰 줄기는 거대하지만, 그 안에 작은 이야기들이 적절히 녹아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시대와 장소를 간접적으로 만나게 해 준다. 정신병원을 맨 정신으로 오려면 의사나 간호사가 되는 수밖에 없다. 금지된 구역,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 정신병원 박물관에 그토록 오고 싶었던 이유였다.
그래서 이런 장소는 한국에서 ‘언덕 위의 하얀 집’이라고도 부른다.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상상하면, 교외의 아름다운 전원주택을 떠올릴 법하지만, 정신병원을 일컫는 은어라는 건 모두가 쉬쉬하며 아는 사실이다. 정신병원을 대놓고 말하지 못했던 건, 정신질환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와 연결된다. 은밀히 숨겨야 하고, 폐쇄적이고, 사회와 동떨어진 곳. 자신 또는 가족에게 정신질환이 있다는 건 인정하기도 어렵고, 드러내기는 더더욱 어려운 시절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외벽이 하얗게 칠해졌던 때의 사진 자료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언덕 위의 하얀 집’이었을까?
미국 정신병원의 역사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미국의 정신병원은 커크브라이드 플랜(Kirkbride Plan)에 뿌리를 둔다. 이것은 19세기 중반 미국의 정신과 의사였던 토마스 커크브라이드가 설계한 정신병원 시스템을 말한다. 그의 설계로 탄생한 정신병원은 미국 전역에 걸쳐 73개나 건설되었고, 여전히 30여 개의 병원은 철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국가 사적에 등록되었다. 그중에서도 오리건주 세일럼의 정신병원은 특별하게도 박물관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커크브라이드 플랜의 기본 골자는 바로 병원의 구조적인 특징이었다. 교외의 공기 좋은 곳에 건물을 지어 조용히 치료에 전념할 수 있게 만들고, 하얀색으로 외벽을 칠해 심신의 안정을 꾀했다. 건물은 중앙에서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박쥐 날개 모양으로 지었는데, 자연광 노출과 공기 순환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병원부지도 100 에이커 이상으로 넓어야 하며, 드넓은 농지에서 환자들이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토마스 커크브라이드의 사진과 그의 계획에 대한 전시공간이다.
커크브라이드 플랜에 의해 지어진 정신병원 건물(1)
커크브라이드 플랜에 의해 지어진 정신병원 건물(2)
그러나 20세기 초까지 미국의 정신병원은 전기충격요법과 같은 치료법,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 등 다양한 질병의 혼합, 우생학 등과 떼어놓을 수 없었다. 스포츠팀을 만들고 음악을 연주하고 작물을 수확하는 등 환자의 건강 회복을 위한 다양한 치료가 이루어지는 한편, 현대 의학의 기준으로는 비인도적이고 환자를 억압하는 방식으로도 존재했다. 맥머피를 식물인간 상태로 만든 뇌엽절제술도 1980년대에 들어서야 폐지되었다.
전기 충격요법(Shock Therapy)에 대한 전시 설명자료다.
환자의 몸을 결박했던 옷과 벨트가 전시되어 있다. 설명에 따르면, 결박되지 않은 환자를 보는 게 더욱 희귀한 일이었다.
다음은 전시에서 소개된 환자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정신병원에 입원할 환자들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많았던 듯싶다.
피라 루돌프의 사례
주부였던 피라 루돌프는 ‘급성 조증(acute mania)’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존 루돌프의 아내였던 그녀는 23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1865년, 이혼하고 말았다. 그녀가 남편의 얼굴에 침을 뱉고, 음식에 담배를 넣고, 계속 소리를 지르며 저주를 퍼붓고, 남편이 잘 때 목을 자르겠다고 협박을 했다는 이유였다. 결국 그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지금은 병원 근처의 묘지에 묻혀있다. 그녀가 입원하게 된 경위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서류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모두 남편의 증언들로만 가득했다. 피라 루돌프의 입장은 어땠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기록이 없다.
엘리자베스 메이어스의 사례
원래 영국인이었던 엘리자베스는 2살에 미국으로 건너와 미주리에서 남편인 존을 만났다. 그러다 44살에 오리건 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 당시 그녀는 어린아이들과 남편이 함께였다. 그리고 1881년, 신경통(neuralgia)을 앓던 그녀는 포틀랜드에 있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왜 일반 병원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보냈을까? 옛날에 사용하던 의학용어는 가끔 일관성이 부족하다. 1887년 의학 사전에 따르면 신경통은 신경의 통증으로 정의되고, 너무 고통스러워서 ‘자살병’이라고도 알려졌다고 한다. 정신병원의 입원 기록에는 그녀가 만성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고 적혀있다.
이들은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죽을 때까지 병원에서 지냈다. 손가락에 가시가 박혀서 이만저만 짜증이 난 게 아니었는데, 19세기엔 정신병원에 입원할 사유가 될 수도 있으려나? 헛웃음이 나왔다.
# 지금은 다시, 빨간 벽돌집이다.
2004년, 병원의 지하에서 이름도 없는 유해가 대거 발굴되어 크게 화제가 되었다. 수십 년 동안 방치되었던 유골이 부식된 구리 항아리에 쌓여있던 모습이 발견된 것이었다. 주인 없는 유해는 무려 약 3,600개에 달했다. 당시 전문가들은 아마도 1913년 정도에 화장된 환자의 것이라 추정했다. 그리고 구리 항아리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비인도적 처우를 단적으로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오리건 주립병원 기념공원(Oregon State Hospital Memorial)의 모습이다.
깡통처럼 생긴 구리 항아리 수백, 수천개가 선반 위에 놓여있다.
박물관 옆길을 따라 걸으면 작은 기념공원이 마련되어 있다.
투명 유리창으로 세운 벽 속에는 구리 항아리가 납골당에서 보던 것처럼 층층이 줄지어 놓여있었다. 이곳을 거쳐 간 많은 환자와 의료진, 그의 가족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Bearing Witness. Giving Voice.
정신병원을 거쳐 간 사람들과 사건에 대해 증언을 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 이것이 오리건주 정신병원 박물관의 슬로건이다. 그들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고 이름도 지워져 기억되지 못했다.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는 사회의 온전한 구성원이 아니었고, 삭제당한 존재였다.
정신병원은 치료를 위한 병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정신질환자’라 불리던 사람들의 집합소였던가? 미셸 푸코는 그의 저서 <광기의 역사>에서 ‘바보들이 타는 배’에 대해 언급했다. 이 배에는 지능이 떨어지거나 정신이 돌아버린 미치광이를 태우고 격리했다.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른바 떨거지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환자가 너무 많아 복도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정신질환의 정의와 정신질환자의 범주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19세기 오리건주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피라 루돌프는 가정폭력의 희생자일 수도 있다. 엘리자베스 메이어스는 통증으로 인해 신경질적으로 변한 환자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어떠한 이유로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지금은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빨간 벽돌집 앞에 주차한 차량에 올라탔다. 생각할 거리를 참 많이 던져주는 좋은 박물관이었다. 힘들었지만, 여기까지 오길 잘했다. 다음엔 또 오기 정말 힘든 박물관이겠지, 하며 아쉬운 마음 가득이었다.
세일럼을 빠져나온 이후, 나는 위험하다고 경고받았던 미국 사회의 현실을 마주했다.
새크라멘토의 한 식당에 앉아 밖을 돌아다니는 정신이상자를 만났다. 그는 한 손에 벽돌을 들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바닥에 내리꽂기를 수십 번이었다. 혹시라도 창문을 향해 던지지 않을까 겁이 났다. 포틀랜드의 한 공원에서는 여러 통의 물병을 집어던지고 밟은 다음 그 앞에서 요가 자세를 취하는 사람도 보았다.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가득 채운 노숙인과 약에 취한 사람들은 뉴스에서 본 것과 같았다. 이것이 정신병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미국이 내린 결론이란 말인가? 이 사람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버려진 건 아닐까?